“기사님 읍내로 가주세요.”
“선생님 댁이라고 들었는데 이거 영월 문산 구석에서 서울 손님을 태울 줄은 몰랐네요 제가. 오늘 운수가 좋으려나 봐요. 이렇게 예쁜 서울 아가씨들을 두분이나 태우고”
“아하하 저희도 강원도 사람이에요.”
“에이 말씨부터가 다른데”
희수와 기사의 대화를 들으며 순이는 창밖을 가만히 보고 있다. 집에 있는 경운기나 트럭, 읍내 갈때 타는 버스에 비해 참 조용히 가는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한가히 앉아 있다 보니 라디오에선 불안한 전파를 타고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로 어제 저녁 조사를 받던 이화여대의 학생들이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4일 반정부 유인물을 돌리다가 체포된 학도호군단 지도부 3인의 석방을 요구하며 발생된 9읠 시위에 실질적인 주동자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정부는 근거 없는 억지와 선동이라며 학도호군단의 주장을 일축했고 이들의 석방을 주장한 이들 역시 법적 원칙에 준수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나라의 지식 일선에 있다는 일류대학에서 이런 일이 있음에 통탄하고 앞으로도 무관용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고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순이가 고개를 돌려 희수를 바라보자 묘하게 불편한듯, 굳어 있는 희수의 얼굴이 보인다. 본인은 반도 못 알아들은 진행자의 말이 희수에겐 다르게 들렸음인가? 생각이 들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희수는 싱긋 웃으며 순이에게 눈을 맞춘다.
순이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집 생각이 난다. 복순은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으로 들어갔고 재무는 모처럼 해 떠있는 쉬는 날이 귀했는지 아침부터 어딘가로 나가고 없었다. 이후 복순은 순이가 집을 나설때도 다녀오라 방 안에서만 대답하고 나와보지 않았다. 먹보 밥도 미리 주고 왔다.
‘창고….’
당연히 오늘 할 일이라 생각했던 창고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날 좋을 때 쉬려고 하니 불편하기가 오늘 처음으로 입은 남에 옷보다 더하다.
“언니 또 집 생각하고 있죠?”
“…”
“제가 영월 온지도 벌써 3개월인데 언니 어디 놀러 다니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쉬는 것도. 남편도 시어머니도 다 좋은데 언니도 좀 쉬어야죠. 보아하니 형부가 그런 걸 챙기실 분도 아닌 거 같고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
“두 분을 욕하는 게 아니라 언니도 가끔은 좀 바람도 좀 쐬고 해도 된다는 얘기 에요 아시겠죠?”
“…알았어”
“자 그럼 오늘은 계속 스마일!”
“...스마일....?”
“웃자 구요! 웃자는 얘기 에요 스마일!”
“…스마일”
“이렇게나 웃는 얼굴이 이쁘신데 언니! 앞으론 좀 자주 웃는거예요 웃어야해요 계속”
순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희수도 마주 웃어 보인다. 어색해진 순이가 다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둔다. 희수도 그런 순이를 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스마일’
본인이 살면서 웃어 본적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순이는 생각한다. 본인 웃는 얼굴이 예뻤던가.... 생각하니 내가 내 웃는 얼굴이 어떤지 알고는 있나? 창 밖에 비친 본인을 보며 한번 더 어색하나마 웃음 지어본다.
***
차는 그 후 30분가량을 조용히 달려 영흥리 중앙시장에 도착했다. 기껏 나온 게 시장이냐 싶겠냐 만, 문산리에 저녁에 돌아가려면 나올 수 있는 곳 이라야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고 평상시 다니던 시장이라고 해도 이것저것 짐을 이고 지고 큰맘 먹고 가서 묵은 볼일을 전부 보고 가야 하는 시장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쁘게 차려 입고 가는 시장은 같은 곳일 수 없었다. 지금 이 곳은 평소 순이가 오던 시장이되 같은 시장이 아니었고 순이도 같은 순이가 아니었다. 보이는 게 같을 수 없었다.
“웃차! 어 형님?”
“…”
값을 치르고 차에서 내리자 멀겋게 서서 시장 입구 한켠을 바라보는 순이가 보인다. 무엇을 보는 걸까
“왜 그러세요?”
“저기...”
“...?”
순이의 시선을 따라가자 찻집이 하나 보인다. 창문에 ‘COFEE BEER’ 이라고 붙여 놨다. 나름 시장에 오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찻집인 듯 보였다.
“저 가게가 왜요?”
“처음 봤어 저 가게.... 있는 줄 몰랐어”
그렇게 시장을 다녔음에도 가져온 물건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한아름 사고 버스가 끊기기 전에 타고 돌아갈 마음에 급하게 시장바닥을 뛰고 걸었을 복순과 순이의 모습이 희수의 눈에 선하다. 둘에게 시장이 가진 복작스러움은 활기보다 오늘 할 일들을 제시간에 못하도록 방해하는 방해꾼이었을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뛰었을 것이다. 꽤나 큰 크기로 옆에 떡하니 있는 찻집에 시선이 닿는 걸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언니도 아침 식사는 하셨다고 했죠? 저기서 저희 차 한잔 먼저 할까요? 어떠세요?”
“응 좋아”
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희수가 순이의 손을 끌고 찻집으로 들어간다.
띠링
문에 달린 종이 울리고 가게안으로 들어서자 커피 향과 담배냄새가 시원한 공기와 함께 둘을 반긴다. 대부분 어느 정도 높이의 칸막이가 처져 있는 자리에 출입문에서 일자로 이어진 길 끝에 손님을 맞기 위한 카운터가 보인다. 사람이 없었으나 종소리를 듣고 카운터로 돌아온 건지 진한 화장을 한 중년의 여성이 매대안에 나타난다.
“어서오세요 어머, 도시 분들이 오셨네?”
“안녕하세요 커피 한잔 하려고 하는데.... 담배 냄새 좀 덜 나는 곳으로 부탁드릴 게요.”
“알았어요 이놈에 시골 촌놈들은 도저히 매너라는 걸 모른다니까? 그쵸 서울아가씨?”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속삭이듯이 말을 한 주인은 너스레를 떨며 웃어보인다. 희수도 적당히 받아 웃어준다. 자리를 안내받고 메뉴판을 펼치자 몇 가지 차 외에 커피와 술 그리고 간단한 식사거리가 눈에 띈다.
“어떤 거 드시겠어요 언니?”
“난 쌍화차...”
“그럼 전 맥주한잔 먹을래요 시원하게!”
사실 순이는 찻집에 와서 차를 홀짝여본 경험이 크게 없지만 그저 가장 위에 있는 걸 골랐을 뿐인데 희수가 맥주를 고르자 깜짝 놀랐다. 본인도 술을 안 하지는 않지만 일하다가 중간에 먹는 새참도 아니고 이렇게 해가 떠있을 때 별일 없는데 술부터 먹자니 퍽 어색하다. 허나,
“그럼.... 나도.... 같은 걸로”
“아하하! 그래요 언니! 시원하게 우리 낮술 해요 좋잖아요!”
기분 좋게 웃는 희수를 보며 순이도 슬그머니 웃었다. 아무렴 어떠나 싶었다. 처음부터 오늘은 평소완 다른 하루, 다른 순이다 그러니 평소와는 달리 그저 순간순간 내 하고 싶은 데로 해도 특별한 오늘에 가려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앞에 희수 빼고는
챙그랑
“건배!”
“건배”
곧이어 나온 맥주 두 잔을 받아 든 희수와 순이가 잔을 부딪힌다. 희수가 술을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박자감있게 넘긴다.
“꺄흐! 어우….”
숨도 안 쉬고 맥주를 마시던 희수는 잔에서 입을 떼고 반갑고 아련한 시선으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듯이 잔에 남은 맥주를 바라본다.
“문산리에는 이게 없어서…”
“…”
희수 하는 양을 바라보던 순이도 커다란 잔을 입에 가져가 맥주를 꿀꺽꿀꺽 삼킨다. 순이의 눈이 점차로 커진다. 처음에 살짝 느껴지는 고소함과 입을 가득 채우는 청량감, 후에 목을 휘감는 탄산의 짜릿함에 살짝 전율이 끼친다.
“……”
희수가 했던 거처럼 순이도 잔에서 입을 떼고 잔을 잠깐 바라본다. 다만 순이의 시선엔 신기함이 담겼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순이는 맥주를 처음 먹어본다. 술을 먹어도 항상 막걸리나 소주였고 이 비싸다는 맥주는 처음이다. 아주 아주 맛있었다. 오늘 모든 경비를 희수가 내기로 약속한거만 아니라면 연거푸 몇 잔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때요 언니? 맥주 맛있죠? 전 막걸리나 소주보다는 맥주가 훨씬 좋아요”
“응… 맛있다 진짜.”
“그쵸? 헤헤 저희 건배해요 건배!”
좋아하는 순이의 반응이 기분 좋았던지 두번째 건배로 잔을 전부 비우고 또 다시 한잔 씩을 시켜 앉았다. 오늘 경비는 모두 희수가 부담하기로 했다. 택시부터 오늘 먹고 입는 거까지 전부. 순이도 집에서 돈을 챙겨왔으나 희수가 오늘 하루는 본인에게 맡겨두라며 한사코 거절했고 순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으려 하자 평소엔 입도 뻥끗 안 하던 본인 아버지가 서울에서 잘나가는 사업가라고 국가한테 돈 벌고 있으니 본인 돈 많다는 어깃장을 놓고 서야 순이가 지갑을 꺼내지 않게 되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맥주 많이 마셨거든요 집에도 사다 두고. 아무래도 서울에선 파는 곳이 많으니까.”
“영월 온거.... 불편하진 않아?”
“편하기만 하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전 좋아요 처음에 왔던 이유보다는 영월이 더 좋아졌어요 나름 재미도 있구요 헤헤”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려나.
“근데 언니는요? 저야 그렇다 치지만 언니는 강원도 그것도 영월에만 계속 계시는 거 좀 답답하지 않으세요? 지금이 진짜 전쟁때도 아니고”
“난.... 계속 여기서만 살았어. 벗어나 본적이 없어서 잘 몰라. 그냥 그렇게 살았으니까…”
“…”
이번엔 희수가 순이처럼 할말을 찾지 못해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저 조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새언니였다. 문산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다는것도 알고 있었으나 본인 입으로 이리 들으니 또 다르게 들려온다. 어떤 삶일까 이 과묵한 새언니의 삶은. 새삼 궁금해졌다.
“언니가 시집 오신 게 18살때라고 하셨죠?”
“응 그쯤....”
처음 그리 얘기를 들었을 땐 그저 그럴 수 있다 생각했지만 직접 같이 생활하고 같이 있어보니 본인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걸로 충분한가? 궁금하지는 않을까? 영월밖에 어떤 세상이 있을지. 고작 맥주 한잔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리 화사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답답하거나 그러 시진 않았어요 언니?”
어울리지 않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깨끗한 손 끝을 내려보던 순이는 고개를 들어 잠시 희수를 바라보다 답 하려한다
"...."
"...."
"모르니까.... 궁금해할 일도 답답해 할 일도 없었어. 내 들에 핀 꽃이 서울 꽃에 비해 예쁜지 못났는지도.... 그저 계속 이자리에 있었으니까."
"...."
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희수의 머리를 강타했다. 답답해한다, 궁금해한다 모두 바깥에서 지내다가 고작 3,4개월 와서 잠깐 생활한 본인이 말은 즐겁다고 하면서 내심 답답하다고, 순이를 보며 똑같이 답답한 곳에 갇혀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본인에게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어디 있지 못한 곳에 있는 것 인냥. 혹시나 본인의 평소 행실이나 눈빛에 실수는 없었는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해보는 희수였다. 자책감과 순이에게 죄스러운 마음에 손끝을 꼼지락거려본다.
“근데.... 서울은 안 궁금하고 딱히 가보고 싶지도 않은데 서울에서 온 사람은.... 좋은 거 같아.”
정작 희수는 본인을 자책하고 있는데 이 나이는 많지만 바보처럼 순수한 새언니는 수줍게 말을 건네고 미소 짓는다. 뭔가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참고 희수가 웃으며 얘기한다.
“아하하 언니도 참, 그래도 서울은 저랑 꼭 가봐요 같이. 나중에라도 아시겠죠? 약속이에요”
“응 알았어.”
희수가 잔을 들자 순이도 잔을 들었다.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창밖을 보니 창밖에 날씨는 화창했고 찻집 안에 있던 칸막이는 어느새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는 조금 더 편해진 듯한 분위기속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집에 있을 때도 둘은 대화를 했으나 복순도 없고 둘만 시내에 나와 있으니 대화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순이도 평소 희수를 보며 궁금했지만 묻지는 못했던 얘기들로 대화를 채워 나갔고 희수는 이야기꾼이라도 된 냥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놨다. 순이도 희수 얘기에 빠져 듣다 보니 이때만큼은 본인이 에펠탑 앞에 있는 거 같았고 서울 신촌 거리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르는 세상이라니. 조금 궁금해지려 한다.
“어 누님?”
“…석아”
지나가던 이가 물끄러미 멈춰 바라보기에 올려다보니 광석이었다.
“여긴 어쩐일이세요? 누님?”
“...오늘 쉬는 날이라”
희수와 순이의 차림새를 보던 광석 어느정도 알겠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띄며 순이와 희수에게 말한다
“맞아요 가끔 누님도 쉬시는 날도 있어야죠. 어머니도 그 연세쯤 되면 가끔은 날 잡고 쉬셔야 하는데 비 오는 날도 창고 정리한다고 들쑤시기 일쑤니.... 막내 형수님 덕분인가요? 제가 다 감사하네요 하하”
“....맞아”
“아하하 제가 어머님께 말씀드려서 오늘 하루 쉬고 저녁에도 맛있는 거 먹기로 했어요 광석씨도 이따가 시간 되면 놀러 오세요!”
“근데.... 일요일에 여긴 웬일로? 왔어?”
“아… 사무소 계장님이 선 자리를 좀 알이 봐주셔서… 오늘 만나보러 가는 길이었어요 어머니가 결혼 언제 하느냐고 계속 들들 볶으시기도 하고 저도 나이가 좀 찼잖아요 이제?
“아....”
“하하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형님은요? 오늘 누님 여기 계시면 형님은 그냥 집에 계시려나요?”
“오늘.... 회관에 무슨 일 있다고 아침부터 나갔는데....”
“회관에요...? 딱히 없을 텐데.... 제가 모르는 건가.... 암튼 오늘 저녁에 갈수 있으면 갈게요! 오늘 하루 잘 쉬시 구요 누님. 하하 형수님도 담에 또 뵙겠습니다.”
광석도 일 때문에 많은 일은 하지 않지만 마을 청년회에 속해있는터라 재무가 오늘 간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 의아하긴 했으나 그럴 수도 있겠 거니 싶었다.
“응.... 잘 만나고 와 집에는 좀 자주 오고”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
광석이 꾸벅 둘에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서자 순이와 희수도 남아있는 맥주를 전부 들이켜고 잠시후에 가게를 나섰다. 밖은 덥지만 아직 공기가 습하지는 않아 그래도 선선하게 돌아다닐 만은 했다. 장날을 맞아 장에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오늘은 그 북적스러움이 복잡함이 아닌 활기로 다가오니 꽤나 기분 좋은 오후의 거리였다. 이후 둘은 시장을 다니며 전병을 간식으로 먹기도 하고 평소엔 들어가본 적 없는 숙녀복 가게에 들어가 옷을 구경하기도 했다. 순이 눈에는 예뻐 보였지만 희수는 어설프게 서울에서 유행하는 옷들을 따라 만든 느낌들이라 영 별로라고 했다.
돌아다니는 동안 순이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알아봤는데 말을 안거는 건지 정말 못 알아본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순이는 지금 본인이 읍내에서 가끔 봤던, 본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도시여성이 되어 있으니 아무도 못 알아 봄직 했다. 그렇게 선선히 시장 안팎으로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자니 평소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과 들뜸이 느껴졌다.
그런 순이와 희수의 발걸음이 멈춘건 ‘상드’라는 간판을 단 악기상 앞이었다.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기에 슬슬 돌아가야 하나 싶던 차였다. 악기상의 창 안으로 커다란 피아노가 보였다. 순이가 알고 있던 일반적인 피아노와는 다르게 생겼다.
“그랜드 피아노라고 해요 언니 다른 피아노들보다 좀 크죠?”
“응 그러네.... 다른 거야?”
“아뇨 거의 같은 거라고 보시면 돼요 소리가 좀 커요 일반 피아노들보다는 아무래도. 한번 들어가서 치는 거 보여드릴까요? 이런 곳은 조율만 해 놨으면 한번 쳐봐도 괜찮을 텐데”
“…그래도 되나?”
“들어가 보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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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아노의 반대쪽 편은 바이올린과 첼로 등 현악기들이 한 벽을 차지하고 있었고 안쪽 카운터에는 반팔 흰색 와이셔츠를 깔끔히 입고 안경 낀 빼빼한 중년 남성이 바이올린을 들고 이리저리 심각히 둘러보고 있다. 목장갑을 끼고 표정을 구기며 바이올린을 살피는 기색이 퍽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구경할 거 구경하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요.”
일견 퉁명스럽기까지 한 대답에 순이는 눈을 굴리고 희수는 입을 삐쭉 내민다.
“피아노 한번 쳐봐도 돼요?”
그제서야 바이올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순이와 희수를 바라본다. 잠시 말없이 바라보더니
“그러세요. 쳐 보기만 하고 다른 건 만지지 알고”
다시 바이올린에 고개를 박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만져본다. 순이는 한 벽에 달려있는 바이올린을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한다.
“이건 이름이 뭐야?”
“바이올린이라고 해요 언니. 이거보다 훨씬 큰 사람 몸 만한 것도 있는데 그건 첼로라고 하구요.”
“저 줄을 땡기면 소리가 나는거야?”
“네 손으로는 아니지만요. 저 알파벳 f자처럼 생긴 구멍에서 바람이 나오면서 소리가 나요”
“아…. 저것도 할 줄 알아?”
“아 아뇨 전 피아노만”
잠시 둘러보던 둘은 이윽고 피아노 앞에 섰다. 밖에서 본거처럼 상당한 크기다. 희수가 의자를 빼고 앉자 순이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희수를 바라본다. 첫 맥주를 먹었을 때의 설렘인가.
“으.... 언니가 그렇게 보시니까 뭔가 떨리는데요.”
“멋있어.”
“아하하”
웃던 희수는 이내 손을 가볍게 풀더니 허리를 펴고 가만히 피아노 건반을 내려다본다. 건반에 손을 올려두자
슥
어느새 웃음기는 사라지고. 천진한 시골 처자가 아니라 청중 앞에선 연주자로 화한다. 조용하지만 힘있게 또 섬세하게. 이윽고 희수의 손에서 연주가 시작되자
“_____----- --_---___- ___-- --__--"
‘아....’
순이의 눈에는 마치 희수를 제외한 세상이 모두 정지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오로지 희수와 피아노 그리고 순이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단절감. 조용히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 뒤에선 가게주인이 깨끗한 천을 꺼내 바이올린을 닦고 있는 일정한 소리마저 선율에 녹아들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본인이 살고 있는 세상과 동 떨어진 것처럼 생소한 감각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황홀함.
음악이란 항상 노동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한 역할만을 하던 순이에게 희수의 피아노 연주는 아예 새로운 세상을 감각하게 했다. 있는 줄 모르고 있던 문을 열고 나와보니 새로운 세상이, 별천지가 펼쳐진 것 같은 기분.
눈을 반쯤 감은 채 연주를 이어가던 희수가 이내 손을 멈추고 손을 무릎위로 가지런히 올릴 때까지 순이는 끝났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건반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후
희수의 짧은 날숨을 끝으로 세상이 제 속도를 찾으며 악기점은 다시 세상에 섞여 들었다. 희수는 진지한 표정에서 예의 웃는 얼굴로 바뀌며 순이를 올려다본다.
“어때요 언니? 저 잘 치죠?”
순이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응… 진짜.... 진짜.... 멋있다.”
“에헤헤”
“이 노래는 제목이 뭐야?”
아직도 머리속에 떠다니는 꿈결 같은 피아노 선율을 생각하며 순이가 묻는다.
“녹턴이라는 곡이에요 쇼팽이라는 사람이 만든 노래구요. 노래 좋죠?”
“응 정말....”
“어설픈 솜씨가 아니네 아가씨. 영월 바닥에서 이런 쇼팽을 들을 줄은”
“아하하 감사합니다 사장님. 피아노가 관리가 아주 잘돼 있어요. 애정을 가지고 관리하신 게 느껴지는 게. 이 정도로 관리 잘된 피아노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럼. 내가 나보다 더 아끼는 물건이니. 다음에도 지나가다가 생각나면 언제든 와서 한번씩 쳐주게. 좋은 연주 잘 들었어.”
“아하하 네네 감사합니다”
“옆에 언니는 정신 좀 차려야겠구만.”
아직도 희수의 연주를 곱씹던 순이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희수가 싱긋 웃으며 순이를 바라본다.
“이제 갈까요 언니?”
“응 가자”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가게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 순이는 아까 느낀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간은 멍한 상태였다. 그걸 아는지 희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순이에게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도 한참 있다가 순이가 희수에게 물었다.
“나도.... 배우면.... 그런 거 칠수 있어?”
“그럼요 언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천천히 배우면 얼마든지요 제가 열심히 가르쳐 드릴게요!
“응.... 고마워....”
버스에 올라타 문산리로 돌아가는 길에 창문에 얼굴을 기대 순이는 오늘 아침부터 지금 까지를 생각한다. 어울리지 않게 예쁜 옷을 입고 읍내에 간 일. 처음 마셔본 맥주. 마지막으로 생에 처음으로 들은 피아노 연주곡까지 그 무엇 하나 새롭지 않고 멋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참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였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순이에게 살짝 기대 졸고 있는 희수가 보인다. 희수를 바라보던 순이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침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환한 미소와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