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그럼 이따가 봬요!”
“응.”
버스에서 내린 희수와 순이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희수는 집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퇴근한 재학과 함께 집으로 오기로 했다. 순이는 저녁 어스름이 끼기 시작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집으로 향한다. 재학과 희수가 집에 오기전에 저녁 먹을 준비를 끝내려면 서둘러 가야겠지만 오늘은 그저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렇게 집에 들어서자 재무는 집에 들어와 마당에 아궁이를 펴놓고 불을 떼고 있었고 먹보가 순이를 보고 반긴다.
헥헥헥
“뭐 한다고 이제 들어…! 어…?”
순이를 보고 일어나 말을 걸던 재무는 평소와 다른 아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선 상태로 굳었다.
“다녀왔어요.”
“어어…. 큼 다녀왔어? 좀 일찍 들어오지”
“네 얼른 준비할 게요.”
“내가 닭 손질 해놨으니 삶기만 하면 돼.”
“순이 왔냐?”
“네 어머니”
방 안에 있다가 순이가 들어온 소리에 나와본 복순은 순이의 차림새를 물끄러미 보다가 별말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매일 봐온 시모이지만 오늘따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 없다. 하루 종일 본인 옆에 붙어 있지 않고 나다니다 온 게 기분 상한 거 같진 않은데. 묘하게 어색해진 순이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입고 온 옷은 희수가 선물이라고 돌려줄 필요 없다고 한다. 옷걸이에 걸어보니 다시 입을 일이 있을까 싶은 예쁜 옷. 가만히 옷을 들여다보던 순이는 매무새를 잘 정돈한 뒤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고이 넣어두고 방을 나선다. 재학 내외가 곧 올 테니 얼른 닭을 삶고 밥을 지어먹을 준비를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나와보자 재무는 화장기 있는 순이의 얼굴을 계속 힐끔힐끔 거렸다. 처음 보는 여자라도 된 듯이. 그 시선에 묘하게 부끄러워진 순이는 시선을 피한다.
그날 밤 둘은 오랜만에 밤을 치렀고, 재학 내외는 집에 오지 않았다.
***
순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언뜻 구요한 듯 하지만 집을 찾아 돌아가는 개미, 밝은 곳을 찾아 다니는 날벌레, 부지런히 고기압을 찾아가는 마른 바람, 어디선가 힘차게 울고 있는 귀뚜라미 이 모든 소리가 어울려 북적이는 시골길을 희수는 조용히 걷고 있다.
조금씩 어둑어둑 해진다. 여러가지 생각을 머리속에 풀어놓은 채 방향을 정하지 않고 잡히는 데로 머리속에서 생각에 꼬리를 물어 의식을 따라가니 결국 오늘 하루 종일 같이 나들이한 웃음이 예쁜 한 여자에게로 방향이 잡힌다. 그저 본인 생각에 맞춰 순이가 불행할 거라 생각하고 행동한 본인이 다시 한번 더 부끄러워진다. 순이는 본인이 아닌데.
‘그래도 서울은 꼭 한번 같이 가봤으면 좋겠네.... 좋아할 텐데 언니.’
봄날의 햇살처럼 근사했던 순이의 미소를 떠올리며 근시일안에 서울에 갈 핑계가 생기면 꼭 시모를 설득해 같이 서울에 다녀오리라 마음먹은 희수였다.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천천히 걸었음에도 어느새 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재학의 구두는 신발장에 정리돼있고 집에 불도 켜져있다.
“여보 들어왔어요? 말한데로 언니랑 읍내에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길어졌어요.”
소파에 앉아 희수를 돌아보지도 않던 재학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희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 언짢은 표정과 말투다.
“시댁 식구들이랑 일부러 친하게 지낼 필요 없어. 내가 얘기 했잖아.”
“갑자기 그 얘기를 왜 다시해요?”
“억지로 그렇게 여기 사람들 분위기에 맞춰서 하기 싫은 일 할 필요 없다고. 나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영월 생활하게 한 거로 이미 충분히 마음 좋지 않으니까 그 이상 노력 안해도 돼.”
“그 얘기는 더 안하기로 한 거 같은데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 부분 아니라고 분명히 나는 얘기했고.”
희수의 말에도 불편한 기색과 약간의 노여움이 실린다. 이전에도 이런 대화가 있었던 듯 지친 내색마저 보인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내가 그 모습을 맘 편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알면서 그래?”
“재학씨.”
잠시 입을 다물고 호흡을 고르는 희수
“난 분명히 얘기했어요. 서울에서 당신의 선택도 영월에 오는 것도 나도 당신과 같이 고민하고 결정했던 거고 그로 인한 결과도 당신 혼자 책임지게 할 생각 없어. 그러니 이건 우리 부부 일이고 또한 내 일이기도 해. 그러니 이 상황이 당신 탓 인양 죄 지은 듯 행동하지 말란 말이야. 우린 지금 우리가 선택한 결과를 마주한 거야 실패한 게 아니라. 그저 결과”
“그럼 시댁에는 왜 자꾸 들락거리는 건데? 오고 싶지도 않던 영월까지 왔는데. 나 더 눈치 보이라고 하는 거 아니야?”
“하.... 재학씨 몇 번이나 얘기한 거 같은데 난 영월에 오고 싶지 않다고 내 입으로 말한 적 단 한번도 없고 그렇게 생각한 건 오로지 재학씨 혼자야. 그리고 재학씨 어머니고 가족이지만 나한테도 시모이고 시댁이기도해 어떻게 행동할지는 내가 결정해.”
“…”
“나도 결정했고 감당하는 중이야. 당신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그 와중에 내가 당신한테 얘기한 것들도 물론 전부 진심이고. 지금 영월이 좋다는 말 또한. 그 이상 나가는 건 당신 스스로 자책하고 열등감에 빠지는거 같은데 그러지 말라고.”
재학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앉아있다. 언뜻 보면 화를 참는 거 같기도, 언뜻 보면 아무 표정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고싶은 말이 없어 서가 아니다. 더 이상 얘기 꺼내면 정말 스스로가 추해진 걸 알기에, 추한 본인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모난 말을 본인이 뱉을지 알기에 입을 다문 것이다.
“오늘은.... 어머니 집에는 못 가겠네 얼른 씻고 와요. 옷만 갈아입고 저녁 준비할게.”
희수는 침실로 향했고 재학은 못박힌 듯 한참이나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앉아있는 동안 숨을 신경 써서 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