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으….”
어디선가 멀리 들려오는 소란스러움과 몸 전체를 데우는 열감에 순이는 눈을 떴다. 아침 짐을 전부 옮겨 놓고 잠깐 가게 앞에 앉아 쉰다는 것이 이른 아침 눈을 뜬 피로에 깜빡 잠에 들었나 보다. 아침잠이 없어진 햇볕은 밥도 안 먹고 잠에 든 순이를 깨우느라 오래도록 순이에게 머물렀고. 시장 안 모든 가게는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다.
“일어났냐?”
“아... 나오셨어요”
키는 작지만 적당히 살집이 있고 주름살이 얼굴 웃는 양으로 있어 인상 좋아 보이는 노인이 순이에게 말을 건넸다. 어느새 나온 가게 주인인 정남이었다. 시장에서는 김씨할배라 불리었다. 이 인근 동리에서 가장 많이 배웠다는 소문 답게 항상 신문을 챙겨보려 했으며 앉아서도 항상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채였다. 역시나 지금도 가게 안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 들여다보고 있었고.
“깨울까 하다가 곤히 자기에 그냥 뒀다. 밥부터 먹어라.”
“…예”
잠깐 일어나 있었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고 넘어가 땀을 식혔다. 점심과 저녁은 사장부부와 같이 먹었지만 아침은 정남이 집에서 도시락을 가져다주면 간단히 요기하는 편이었다.
“최가 왔다 갔느냐?”
“네”
“별 말은 없디?
“….”
한 옆에 놓여진 플라스틱 팔레트를 엎고 그 위에 나무 판자를 얹어 만든 간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순이는 조용히 일어나 정남에게 최씨가 전해준 전표를 내밀곤 다시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본인의 역할은 그저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라도 되는 냥 어떤 뜻을 내비치지 않은 꼴이었다.
“……후”
전표를 받아 든 정남은 전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밭은 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가게를 운영하기에 본인과 안사람은 체력적으로 한계다 생각했는데 이젠 가게를 팔아치워도 몇푼이나 건질까 싶을 정도로 사정이 안 좋아졌다.
한숨 쉬는 정남을 물끄러미 보던 순이는 다시 밥에 집중한다. 일찍부터 일어나 짐을 날라서 그런가. 배가 많이 고팠던 터였다.
“잠깐 다녀오마. 천천히 먹거라.”
“…네”
김씨할배가 짧게 말하곤 가게를 나서 사라졌다. 문을 안 닫고가 이른 여름의 선선한 아침바람이 가게안을 휘돌았다. 요즘 부쩍 순이는 가게 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김씨할배는 가게에 나와서도 이렇게 짧은 말을 남기고 몇시간이고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주인 할머니는 어느새 가게에 나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
가게에 주인부부가 있으나 없으나 순이가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별 상관없었다. 처음 보는 손님 상대하는게 말주변이 없는 순이로선 힘든 일이었으나 그나마 가게에 오는 손님이라곤 매번 같은 얼굴들이라 특별히 대화가 필요치도 않았고.
식사를 마친 순이는 간단히 뒷정리를 한 뒤에 의자를 끌어와 입구 근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늘지고 바람이 잘 드는 곳으로. 밥을 먹다 보니 어느새 땀은 다 식었고 적당히 배도 불렀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가게 바깥의 시끄러운 소음이 적당히 걸러져 듣기 좋은 활기를 자아냈다. 봄이 끝나가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최씨가 가게에 다녀가고 시간은 흘러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계절이 왔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도 그쳐 단풍잎이 물들기 전까진 그저 무더운 일만 남았다. 가을에 필 코스모스를 빼면 순이에겐 기대할것이 없는 나날만 남아있었고 다시 봄이 올때까지 또 견디어 내야할터였다.
“순이야”
“...네”
오랜만에 사장 부부와 순이가 밥상에 둘러앉은 참이다. 오늘도 찌는듯 더운 하루였고 상회의 세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인 일이었다. 오랜만에 사장 부부가 가게에 나란히 나와 오후 나절 가게를 같이 봤고 사장 부부의 집으로 와 저녁을 먹었다. 색이 다른 나물 몇가지와 싱겁지만 맑게 끓여낸 국, 조금이지만 고기도 밥상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밥상은 꽤나 진수성찬이었다. 평소와 다른 하루와 사장 부부의 기색에서 무언가 할말이 있을 거라고 순이가 생각하던 때였다.
“이제 우리가 가게를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려울 거 같구나.”
“…...”
순이도 예상한 바였다. 봄에 비해 가게의 상황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꾸역꾸역 가게문을 열고 닫아왔다고 보는 게 맞았다. 이런 상황에 가게를 유지하는 이유 중에 본인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렵지 않았고.
“가게사정이 안 좋아져서 어쩔 수가 없구나...”
정남의 부인인 자현이 다정히 말을 건넸다. 자현은 말랐지만 전체적으로 인상이 좋았고 어딘가 남편인 정남과 닮아 있었다. 부부로 오래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런가. 정남도 자현도 넉넉치 않은 형편이지만 항상 단정한 모습을 유지한다는것도 그랬다. 정남은 항상 오래됐지만 구두를 신었고 자현은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겼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자현은 몇 년은 더 나이들어 보인다. 이 시기에 사람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네”
“혹시 다른 갈 곳이 있니? 친척이라거나”
알면서도 자현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가게 정리하시기전에 나갈게요.”
순이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여지껏 지내던 가게들 에서도 자식을 유학보낼때, 가게 사정이 안 좋아질때, 노모를 부양해야할 때 여러가지 이유로 입을 줄여야할때 순이는 그 집을 떠났고 이번에도 그저 그런 일 일뿐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이제 니 나이도 충분히 찼고 이것 좀 보거라.”
“….”
정남이 내민 것은 시장 대포집에 붙어있던 구직광고였다. <탄광 사무실 여경리/숙식 제공/월급 1,000원(원으로 지급)/문서작성 가능자 우대> 순이도 봤지만 딱히 눈여겨보지 않았던 전단지.
“이제 너도 나이가 나이이니 시장 돌아다니는 건 그만하고 정착해야 안되겄냐.”
“….”
정남이 순이에게 얘기했다. 본인들은 늙었고 뻔한 형편에 순이를 끝까지 건사해주진 못하지만 어떻게든 순이의 앞날을 같이 고민해주고 싶었다. 그게 본인들이 죽기전에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고. 정남과 자현은 최근 몇 달 노구를 이끌고 참 부지런히도 다녔다.
“아니면 나는 순이가 좋은 집에 시집 갔으면 좋겠다.”
옆에 있던 자현이 말을 덧붙혔다.
“순이가 원하면 내가 중매설 수도 있고”
“….”
자현은 마차리 시장에서 가게를 오래 운영한 만큼 동네 총각 처녀들을 수차례 중매선 경험이 있었다. 중매비도 받지 않고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마치 없는 자녀들 잘사는 모습 같아 보기 좋다고 웃으며 순이에게 수차례 얘기했던 적도 있고.
“……”
하지만 순이는 정남과 자현의 이런 얘기들이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최근 기색으로 이제 가게를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는 느꼈으나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본인이 생각하고 결정해본 적은 없었기에. 그저 흘러가는 데로. 시간은 순이를 어딘가에 데려다 놨기에 뻔히 닥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생각 좀... 해볼게요”
말을 하면서도 순이는 생각했다. 생각을 해본다니. 내가. 무엇을?
“그래. 그러거라 그렇다고 당장 가게를 정리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보자꾸나.
“시집은... 얘 이제 17살이고 해 지나야 18살인데. 내가 알아보니까 여기 글 읽고 쓸 수 있으면 돈 많이 준데. 내가 다 알아봤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데려 다가 고생만 시키고 돈 제대로 안주는 곳이 어디 한 두군데에요? 괜찮은 집 시집가서 가정 꾸리는 게 최고 좋아요. 그리고 18살이면 다 시집가는 나이지 뭘 그래요. 어디 봐봐요 이 근방에 순이 나이에 시집 안간 처녀가 어디 있나.”
“18살짜리가 뭘 안다고 시집을….”
“그럼 18살짜리가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가서 일하는 건 뭐 대단히 좋을 거 같아요?”
정남과 자현이 순이 앞에서 가볍게 투닥거렸다. 본인들 나름대로는 순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렸다. 그 투닥거림에 깔린 따뜻함이 느껴졌기에. 끝까지 순이와 함께해주지 못하는 노인들의 미안함과 앞날을 같이 고민해준 배려와 걱정이 느껴졌기에 순이는 사장 부부를 보며 웃었다. 곧 있으면 순이는 또 지내던 곳을 옮겨가 새로운 곳에서 눈을 떠야겠지만 오늘은 그저 웃을 수 있었다.
***
해로쌀상회에 사장부부와 한 청년이 함께 온 것은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부리부리한 인상의 이 청년은 순이도 시장에서 가끔 보던 사내였다. 자현은 이 옆에 있는 문산리에서 농사 짓는 최가네 장남이라고 청년을 소개했다.
“이집 어멍이 사람이 아주 강직해서 일찍이 사별했는데도 자식들을 아주 강단지게 잘 키웠어. 이 집 막둥이가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데 서울 보내서라도 공부 꼭 시켜라 할 만큼 똑똑타고도 허고.”
“….”
“안녕하세요 최재무라고 합니다. 우리 초면은 아니지요?”
“…”
남자에게선 땀냄새와 희미한 두엄 냄새가 났다. 여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순이에게 여름은 그저 견뎌내 야하는 계절이었건만. 이이에게서 나는 냄새는 분명한 생태의 냄새였다.
“아이고 참 잘 어울리는 한쌍이네 그려”
자현은 벌써부터 이들이 결혼이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순이는 또래 남자와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어 계면쩍다.
“잘 어울리는 한쌍은 무신… 오늘 처음 대면했는데.”
“전에도 몇 번 봤다잔아요 괜히 꼬라지는…”
옆에서 괜히 궁시렁대는 정남을 흘겨보는 자현이다. 정남은 본인이 봤을 때 아직 어린 순이에게 벌써부터 중매를 서고 결혼을 권하는게 못내 못마땅한 눈치다. 주변 처자들이 18,9살이면 전부 혼사에 드는데도 순이가 어리게만 보이는 정남이다.
“그럼 둘이 말 좀 나눠 나랑 영감은 잠깐 어디좀 다녀올게”
“뭐 이 더운데 어딜 간다고 그래”
“아 그냥 좀 따라와요!”
자리 잡고 앉으려는 정남의 팔을 낚아채고 가게를 나서는 자현이다.
“마땅히 가족이 없다고 했지요?”
“…”
“아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전혀 아니오. 나도 아바이가 10살 무렵에 돌아가셨어. 이젠 얼굴도 잘 기억 안나요”
“….네”
“오매가매 순이씨 얘기를 들었어요 나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족을 일찍 만들어 애 놓고 살고 싶다 생각하고 있던 차였지. 어머니도 장남인 내가 그러길 바라실테고 마침 내가 순이씨 건사하며 챙겨 살 정도는 되니… 우리 얼굴 몇 번만 더 봅시다.”
“…”
“그럼 오늘은 이만 가리다. 몇일 안에 한번 더 올게요. 그땐 밥이라도 먹읍시다.”
“…네”
재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순이는 일어나서 나가는 양을 보고 있었고. 가족이라... 수년간 본인이 가지게 될 거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이렇게 시장에 존재하다 어느 순간 아무도 본인을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런 나도 가족이 생기는건가 하고 순이는 생각했다. 아직 먼 일이라 할지라도.
사장 부부가 돌아온 것은 재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갔니 갔어? 순이야 어떻디 사람 괜찮아 보이지?”
“...네...”
“한번 보고 괜찮아 보이긴 뭘….”
“아 가만 있어봐요 좀! 순이야 저이 집이 문산리에선 농사를 제법 크게 짓는다더구나. 그런거 치고 식구수도 얼마 없어서 건사할 사람도 몇 없고. 저이 할매가 같이 산다고는 하는데 천수를 다했다고들 하고. 사람도 가장 노릇을 일찍이 해서 사람 건실해 봬고 내가 봤을 때 이만한 혼사 없다.”
자현은 평상시에 온난하고 다정한 말씨는 잠시 집에 두고 왔는지 흥분해 말을 쏟아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나 오랜 시간 자현이 눈 여겨 봐온 중매감이었다고 한다.
“…네 근데 문산리면...”
“산 너머에 있는 동네다. 걸어서 가면 먼데 몇 년새 뭐가 생겨도 생길 거다.”
정남이 말을 붙였다. 그리고 조용히 순이 앞에 앉아 본인의 주름진 손을 순이의 손에 포개었다. 손녀를 바라보듯 다정히 눈을 맞추고 한자한자 말을 이었다.
“순이야. 마누라가 데려왔다고 해도 꼭 저이와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는 거 아니다. 보통 여자들이 너 나이쯤 시집가서 결혼하고 산다고 꼭 너까지 그러라는 법 없어. 그리고 내가 말해준 그 일자리도.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보고 순이가 하고싶은 데로 결정하거라. 아직 시간은 있으니. 안사람은 순이가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생기면 참 좋고 걱정 없겠다 싶어서 저러지만 저것도 어디까지나 늙은이들 노파심이니 넌 너 하고싶은 데로 해. 알았지?”
“…네”
먼 세월 후에 돌이켜보니 순이는 이때 오히려 결혼해 가족을 이루어 산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 다정한 만류의 말에서. 평생을 다른 집 식객으로 살았고 가족이란 것을 생각해본 적 없는 순이였기에 원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었으나 처음으로 돌아갈 집이 생기고, 떠나지 않아도 되고 본인을 떠나지 않는 가족, 끝까지 본인을 걱정해주는 가족이 생긴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 정남과 자현처럼 같이 늙어갈 수 있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리고 저놈... 듣자 하니 글을 못 읽는다더라. 너한테 너무 기우는 놈이니 천천히 고민하거라.”
“푸흡”
“이이가?!”
뜬금없이 뱉은 정남의 드문 농담에 순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낄낄낄 얼른 가게 문 닫고 밥이나 먹자꾸나.”
“네”
***
“원래 그렇게 말이 없소?”
“아…. 네….”
“여자는 말을 안하는 게 첫수라고…. 좋지요”
“….”
순이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않은 채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여자는 말을 안 하는게 첫수라… 곰곰이 말을 되짚어 볼 뿐이다.
“내 아래로 동생이 하나 있소.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데 공부를 워낙 잘해놔 서울로 유학보낼려고 하고 있지. 식구가 적은 편이오 우리집은. 결혼하면 시모 모시는거야 순이씨도 염두에 두고 있을 테고.”
“…...”
정남부부와 함께 가게에 온 이후로 일주일만에 재무와 마주했다. 가게에서 말했던 데로 시장에서 국밥을 한 그릇 같이 말아먹었고 잠깐 걷기위해 길을 나선 참이었다. 평소 순이는 밥을 천천히 먹으나 재무가 마치 금방이라도 밭에 나가야 하는 농사꾼 마냥 밥을 해치우는 바람에 순이는 반 이상 남겼다.
처음만난 날과 달리 빨래 비누 냄새를 풍기는 이 남자는 시종일관 가족 애기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 농사 얘기로 말이 끊이지 않았다. 평소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딱히 본인얘기는 할 게 없다고 여기는 순이와는 다르게.
“우리 어머니지만 어디가도 이리 모시기 쉬운 시어머니가 없을 것이오. 입도 까다로우신 분이 아니셔서 어지간한 음식은 그냥 드실 것이고 빨래도 얼룩 있는 부분을 깔고 앉을 분이시라. 음식은 좀 하시오?”
“…아니요 음식은 잘…”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지. 걱정 안해도 돼요. 그런 거 흠잡는 집 아니에요 우리집이.”
“…네”
걷다보니 마차리 시장의 끝까지 왔다. 이 이상 가게 되면 산길이다. 나란히 걷던 재무가 조금 앞서 걸어 순이를 마주본다.
“그럼 다음주쯤 날 정해서 오겠소. 그날 집에 가서 어머니께 인사드립시다. 그 이후에 날 잡아서 사진관에 사진 찍으러 가고.”
“…사진이요?”
“뭐 식까지 올릴 필요있겠소? 인사드리고 사진관 가서 양장이랑 한복 빌려서 사진이나 한 장 박고 말지”
“……”
“그럼 가리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말을 마친 재무는 순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오후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문산리에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할 터였다. 순이는 재무의 뒷모습으로 마차리에서 문산리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사실 재무와 첫 대면 이후로도 순이는 아직 특별히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가족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속에 계속 잔영처럼 남아있을 뿐. 그러다가 재무와 약속한 날짜가 찾아왔고 재무는 이미 결혼한 사이인 것처럼 얘기했으며 순이도 굳이 다른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재무가 떠나고 마을의 입구에 홀로 선 순이는 재무가 떠난 길을 한참을 가만히 보다 뒤돌아서 마차리 거리를 다시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순이에게 결혼을 할지 탄광촌으로 일을 하러 갈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순이에게 중요한 건 본인이 마차리에서 존재할 시간이 끝났다는 것이고 시간의 문제이지만 본인이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는 거였다. 어디로 갈지보다 순이에겐 훨씬 큰 문제였다. 순이는 어느덧 이 마차리 전체를 집이라 여기는 본인을 발견했다. 평생을 집 없이 살아 왔다 생각했는데 이리 저리 옮기며 살아온 이 곳을 집이라 여기는 본인을 발견하자마자 또 떠나야 하는 순이였다.
결혼을 하면 떠나지 않아도 되는, 항상 돌아갈 가족과 집이 생기게 될까.
아직 코스모스 피지 않은 길을 천천히 걸어 가게에 도착했다. 최근 정남과 자현은 가게에 빠지지 않고 나왔고 순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순이는 노부부가 기다리는 가게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섰고 정남과 자현은 식지 않은 다정함으로 순이에게 물었다.
““밥은?””
“…얼마 못 먹었어요 배고파요.”
순이의 말을 들은 부부의 눈은 살짝 커졌고 이내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그래 오늘은 대충 정리하고 일찍 들어가자. 고기 구워 주마 고기”
정남은 왜 인지 신난 모양으로 뒤돌아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자현은 조용히 순이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고기 구워먹자꾸나 순이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