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순이를 마중하기 위해 정남, 자현 부부와 시장에서 순이를 돌보았던 시장 사람들이 순이를 둘러섰다. 재무는 한 옆에서 사진관에서 뽑은 사진을 액자에 인화한 채로 들고 있다. 순이의 얼마되지 않는 짐은 이미 사람을 써 문산리로 보냈기에 순이의 짐은 단촐하다.“순이야 이거 가져가거라.”“…?”정남과 자현 부부는 떠나는 순이에게 낡지만 깨끗한 보자기로 꼼꼼히 감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마차리 시장에 하나 있는 은행에서 만들 수 있는 통장이었다. 열어보니 통장에는 순이가 가게에 오기 전인 3년 전부터 매달 꾸준히 순이의 이름으로 돈이 모이고 있었다.“너가 우리 가게에 오기 전부터 시장 사람들하고 얘기해서 매달 몇 푼이나마 모아놓은 거다. 우리 가게에 오고 나서부터는 우리가 넣었고.... 팔자 고칠 정도는 못되어도 어디서 방 한 칸이라도 얻겠 거니 싶어서…”통장을 보니 2년 전에는 통장에 들어가는 돈이 제각각이나 가게에 오고나서부터는 매달 300원씩 꾸준히 들어가있었다. 외상값을 치르지 못해 곤란을 겪은 때에도 순이 앞으로는 꾸준히 돈이 쌓이고 있었다. 거의 만원에 가까운 돈이다.순이는 가만히 서서 통장을 펼쳐보고 쓸어 보기도 하다 이내 결심한듯 정남에게 얘기한다.“전 이 돈… 못 받아요 그동안 보살펴 주신 것도 있는데 돈까지… 이제 가게도…”“아서라. 우리가 너를 뭘 보살펴 오히려 니가 늙은이들 보살피느라 고생했지 가게도 몇 푼 안돼도 팔아 치우면 늙은이들 죽기전까지 보신할 정도는 될 거다. 그러니 우리 걱정 일랑 하들 말고.”순이의 말에 정남이 숨도 쉬지 않고 쏟아냈다. 순이가 어떻게 얘기할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투다.“순이야… 우리가 더 오래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가서도 잘 지내고, 거기 있으면서도 시장에 올 일이야 없겠냐만… 언제든 배고프고 보고싶거들랑 집으로 오거라”“…네 그동안… 감사했어요.”순이가 고개를 들어 본인을 마중 나온 시장사람들을 둘러본다. 정남과 자현이 본인의 바로 앞에, 그들의 뒤로 막걸리집 경자, 국밥집 털보아저씨 등등 힘 닿는 곳까지 본인을 보살폈던 몇몇 어른들이 순이를 배웅하고 섰다. 저마다 항상 바쁘게 일을 하던 복장 그대로다.전을 부치다 와 앞치마에 밀가루가 덕지덕지 뭍은 경자, 고기를 만지다 와 소매에 핏기가 그대로 있는 털보아저씨. 마차리 시장. 순이의 집이었던 이들.부모 없이 내버려진 아이를 굶길 수 없어 제 밥그릇에서 한 숟갈씩 덜어내어 아이를 먹이고 가족들의 살냄새를 좀 더 가까이 맡으며 순이를 재웠던 어른들. 떠나는 순이는 18살로 시집 가는 게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건만 이들에게 순이는 아직도 배고파도 우는 법 없이 조용히 기다리던 작은 아이였다.“이제 그만 갑시다. 묘봉 넘어가다가 해 넘어가면 안돼요.”그런 그들의 배웅을 보던 재무가 한마디 한다. 집에 가 어머니께 절 올리고 아버지 산소에 들리려면 오늘 하루가 빠듯할 듯했다. 내일부턴 다시 밭에 나가야 하니 재무로선 이 이상 여유부리긴 어려웠다.“하여간… 썩을 놈.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거 시간 걸리면 얼마나 걸린다고. 지 사진 고를 시간 서둘렀으면 밥도 먹고 갓겠네.”“쓰읍... 쫌!”재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정남이 투덜거렸다. 몇 장 찍은 사진 중에 재무가 사진을 고르느라 오래 걸려 한참을 가게 앞에 서서 기다린 정남 입장에서야 곱게 보일리 없다.“맘에 드는 구석이 없어…”그게 아니더라도 공연히 마음에 안 드는 정남이다.“순이야 이제 얼른 가거라 가는 길 조심하고 넌 안 가본 길이니 최가 뒤꽁무니 잘 따라가야 한다.”본인을 떠나보내는 사장 부부와 시장사람들을 머리속에 선명히 남기기위해 마지막으로 눈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순이가 이내 자현과 정남에게 눈을 맞춘다. 이들의 나이로 보아 한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순이가 깊게 고개를 숙인다. 짧았지만 진정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해주는 어른을 향해. 그동안의 감사와 오래오래 돌아올 곳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건강 관리 잘하세요 꼭 다시 봬러 올게요.”“그래그래….”이내 자현은 눈시울을 붉혔고 정남은 고개를 돌렸다. 코가 벌개진 채로. 모든 시장사람들도 순이에게 손을 젓고 있다.순이는 몸을 돌렸고 이내 재무도 이들에게 간단히 인사한 후 걷기 시작하자 순이는 재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차리와 문산리 사이에 있는 접산으로 들어가는 산길 초입이 나올 때까지 순이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저 발을 재개 놀리는 재무의 뒤축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얼마나 걸었을까. 걷다 보니 재무가 멈췄고 뒤돌아 순이를 바라봤다. 순이를 한번 보곤 본인의 뒤편으로 나있는 산길에 시선을 한번, 그리곤 다시 순이를 바라본다. 이 길을 나서면 이제 진정으로 길을 떠난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순이는 재무의 시선을 마주보려는데 또 어느새 재무의 시선은 순이를 보고 있지 않다. 순이의 어깨 너머다.몸을 돌려 재무의 시선을 쫓는다. 어느새 욌을까. 한참을 걸어왔음에도 처음 순이를 배웅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자현과 정남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누군가 본인을 떠나가기만 했지 본인이 염려와 걱정을 받으며 길을 나서 본적이 없기에 순이는 가슴에 깊숙이 두방망이질 치며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삭혔다. 흐르려는 눈물을 눌러가며, 손을 흔들어야 할까 허리를 숙여 한번 더 인사를 할까 몰라 내심 갈팡질팡하다 그저 그들이 가장 보고싶을, 마지막으로 기억했으면 하는 얼굴을 떠올렸다.그렇게 감사함과 그들에 대한 사랑을 담아 순이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처음엔 따라가기에 급급했고 숨이 가빠져왔으나 어느정도 산길에 적응되고 별달리 팻말도 없던 정상을 지나 문산리에 가까워지자 길도 넓어져 걷기가 한결 편해졌다. 거의 다왔다 생각이 들자 순이는 본인도 모르게 허리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시모 될 사람 됨됨이 보고 결혼하는 사람 어디있냐 하겠지만, 사람을 대함에 요령 없는 순이로선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터였다. 사실상 남편이라고 하는 재무도 오늘로 3번째 보는 거였고.당초 재무의 집에 먼저 가 인사하고 합가를 할 예정이었으나 번잡스레 올 필요 없다는 시모 될 사람의 말과 재무의 조모가 몸상태가 안 좋아 손님 받을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상황이 맞물려 인사 한번 없이 순이는 길을 나선 참이다. 앞으로 평생 살아야 할 집을 어딘 지도 모르고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는 셈이다.“저기요”산을 나와 논길을 잠시 걷더니 재무가 손을 높이 들어 가리킨다. 멀리서 보기에 조그마한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고 그 사이사이 논과 밭이 빼곡히 차 있다. 순이가 처음 본 문산리의 모습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재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모여 있는 집들을 지나쳐 야트막한 언덕의 중간에 걸쳐 있는 집이었다.“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힘들지는 않지요? 내가 지금 순이씨 발에 맞춰 천천히 온 거기도 하니.“…네”따라가기 급급해 중간에 한번 넘어질 뻔도 했으나 순이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음 그럼 어머니께 인사 드리고 바로 아버지께 인사 드리러 갑시다. 산소가 그리 멀지 않아요 식사는 그 뒤에 합시다.”“…네”순이는 허기 보단 초행인 산길을 요령 없이 걷느라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지만 본인을 배려해 천천히 걷고 있다는 재무의 말에 그저 알았다고 할 뿐이었다.“어어~ 재무 오늘 색시 데려오는 날이구나야~”“아 예~ 어르신 식사하셨죠?”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노인“색시 데려오는겨? 색시가 땡잡았네~ 이 집이 이 동네에선 제일 먼저 농사 그만둘 집이여 이 집이~”길 바로 옆 밭에서 호미질을 하던 중년 여성“아 형아! 시장에서 맛있는거 사왔어?”“석이 이놈 시끼! 형한테 맛있는 거 맡겨 놓았냐? 오늘은 없다. 형이 담에 장에 가면 사다주마. 학이 귀찮게 하지 말어! 형 공부하게”“알았어! 나 갈게!”언덕 위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논길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까지 마주치는 모두가 재무를 향해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체를 한다.“동네 사람들이 선해서 지내기 좋을 거요 처음엔 어색하겠지만”“…네”순이가 뒤에서 보고 있자 재무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건넨다. 순이에게도 퍽 위안으로 다가오는 모양들이었다. 어차피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 보여서.“자! 얼른 갑시다.”인사할 사람 다 인사 했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재무의 뒤를 서둘러 쫓아간다. 멀리 느껴졌던 언덕 위 집이 막상 걸으니 금방이었다.“어머니~ 저 왔어요!”재무가 크게 소리치며 대문을 들어선다. 조용하던 집안에서 잠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방에서 나왔다. 순이보다 한 뼘은 작은 키에 마른 몸집. 고집 있게 다문 입술, 힘을 줘 뜨고 있는 것 같은 부리부리한 눈까지 빈말로도 서글서글해 보인다 말하긴 어려운 강한 인상이었다.“장남이 며느리 데려왔네?”재무가 웃으며 제 어미에게 말을 건넨다. 순이의 시모, 복순이 그들의 앞에까지 왔고 순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자동으로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앞에선 복순은 순이를 찬찬히 위아래로 뜯어보다 재무에게 말한다.“조용혀. 할머님 잠드셨어.”“알겠어요.”“짐이란 꼴랑 옷가지 몇 개에 은수저 한 벌도 없기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싶더만…”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에 말꼬리를 흐리는 복순이다.“그래도 순이씨가 몇 년 열심히 일해서 품삯을 모아놓은 게 꽤 돼요. 여기 통장도”정남이 건네 준 통장을 오는 길에 재무에게 줬더니 알지도 못했던 돈이 어느새 순이가 일하면서 착실히 모은 돈으로 둔갑해버렸다. 통장을 받아 든 복순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저 손에 쥐고만 있다.“어머니께 인사만 드리고 아버지 뵙고 오려고”“뭐 별 일이라고 그렇게 부리나케. 산 넘어오느라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자”장남의 결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몸을 돌려 집 안으로 향하는 복순이었다. 한손에는 통장을 든 채로. 재무와 순이가 잠시간 가만히 서서 복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복순이 고개만 돌린 채 말을 덧붙혔다.“뭐하고 섰어 얼른 들어오지 않고. 너도 얼른 들어오거라”“아. 예!”“…네”순이는 복순을 물끄러미 보다 앞서 가는 재무를 따랐다. 재무와 순이는 그렇게 따뜻했던 배웅과 그렇지만은 못한 맞이로 18살 초여름, 한집 살이를 시작했다.때이른 코스모스향이 순이의 코끝을 스쳐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