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기술

말은 거짓말을 해도, 행동은 거짓말을 못한다

by 구매가 체질

구매 업무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깁니다.

물론 업무적인 얘기 중에는 흥정, 즉 협상이 포함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협상이라 하면 논리적인 데이터와 완벽한 가격 분석을 떠올리지만, 저는 늘 그 이상이 존재한다고 믿어왔습니다.


서류와 숫자가 전부인 것 같아도, 사실 협상 테이블 위에서는 말로 전해지지 않는 '또 다른 대화'가 오가기 때문이죠. 그것은 바로 비언어적 대화입니다. 상대방의 몸짓, 표정, 목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야말로 구매 담당자가 갖춰야 할 비밀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가 현장에서 직접 겪었던 경험과 더불어, 비언어적 소통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1. 바디랭귀지: 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협상 상대의 몸짓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창입니다. 다음은 제가 실제 경험했던 바디랭귀지 케이스들입니다.


케이스 1: 팔짱과 다리 꼬기

상황: 협상 초기, 공급업체 담당자가 제안 가격에 대해 설명하면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았습니다.

분석: 이는 명백한 방어적, 혹은 비협조적인 태도입니다. 마음을 굳게 닫고 제 말에 동의할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해석했습니다.

활용: 저는 즉시 가격 얘기는 잠시 멈추고, 상대가 왜 이런 자세를 취했는지 역으로 유추했습니다. '저희의 요구사항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라고 운을 떼자, 상대의 팔짱이 풀리며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고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방어적 태세가 풀리자 비로소 건설적인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케이스 2: 턱 만지기와 코 비비기

상황: 제가 제안한 계약 조건에 대해 상대방이 '고민해보겠다'고 말하며 턱을 만지거나 코를 비비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분석: 턱을 만지는 것은 의사결정 중이거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신호입니다. 반면 코를 비비는 것은 불안감이나 거짓말을 하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활용: 상대는 제 조건에 대해 고민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가격을 더 낮출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결정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보다, '더 이상 드릴 수 있는 것은 없는 건가요?'라고 부드럽게 재차 확인하며 스스로 '이 가격이 최선이다'라고 말하게끔 유도했습니다.


2. 얼굴 표정: 찰나에 드러나는 진짜 감정


얼굴 표정은 가장 섬세하고 복잡한 비언어적 신호입니다. '미세 표정'은 0.5초 안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짧은 표정 변화로, 숨기려 하는 감정을 드러냅니다.


케이스 3: 계약 성사 소식에 나타난 미세 표정

상황: 수개월간의 협상 끝에 계약 성사를 알렸을 때, 상대방의 얼굴에서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실망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석: 분명 겉으로는 기뻐하고 악수를 청했지만, 미세한 표정에서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활용: 저는 이 신호를 통해 이 계약이 우리에게만 유리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아쉬움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협상 때, 저는 이 미세한 표정을 기억하고 상대의 입장을 더 배려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 목소리 톤과 속도: 말의 겉옷을 벗겨라


목소리는 메시지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케이스 4: 빠른 말과 높은 톤

상황: 상대방이 특정 조항에 대해 설명하며 갑자기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습니다.

분석: 이는 상대방이 숨기려는 정보가 있거나,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을 서둘러 넘어가려는 신호입니다. 마치 '이 부분은 빨리 넘어가고 싶으니 묻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활용: 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잠시만요,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멈춰 세우고, 관련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습니다. 결국 상대방은 해당 조항의 약점을 인정했고,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더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4. 책과 논문이 말하는 비언어적 소통의 과학


제 경험 외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비언어적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조 내버로의 : 전직 FBI 요원이었던 조 내버로는 그의 저서(FBI 관찰의 기술) 에서 팔짱이나 발의 움직임 같은 신체 언어를 통해 거짓말이나 불안감을 파악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특히 '편안함 대 불편함'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상대가 불편함을 느낄 때 보이는 행동(예: 턱을 만지거나 목을 쓸어내리는 행동)을 통해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폴 에크먼의 미세 표정 연구: 심리학자 폴 에크먼은 <얼굴의 심리학> 등의 저서와 논문에서 얼굴에 순식간에 나타나는 미세 표정을 통해 보편적인 감정(기쁨, 슬픔, 분노, 놀라움 등)을 읽어낼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협상에서 상대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미세 표정에서 불만이나 실망이 드러난다면, 이는 협상의 다른 부분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중요한 신호가 됩니다.


최근 신경과학 논문: 최근 연구들은 비언어적 신호가 뇌의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2019년 Nature Neuroscience에 발표된 한 논문은 타인과의 '신뢰'가 형성될 때 뇌의 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상대방이 협조적인 제스처(예: 손바닥을 보여주는 행동)를 보일 때 우리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신뢰를 쌓기 시작하며, 이는 결국 긍정적인 협상 결과를 이끌어낼 가능성을 높입니다.


비언어적 대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본


이런 경험들을 쌓다 보면 위의 모든 내용들이 의식적인 노력에서 점차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마치 시장에서 오랜 시간 물건을 팔아온 상인이 손님이 들어서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의 표정과 발걸음만으로 살 사람인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듯이 말이죠. 비언어적 소통은 지식으로 배우는 것을 넘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체화되는 감각입니다.


구매 담당자에게 비언어적 소통 능력은 단순히 유리한 조건을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진짜 심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한 공감의 시작점입니다. 저는 이 '보이지 않는 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 숫자와 논리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은 신뢰와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만든다고 믿습니다.


구매 업무를 하시는 다른 분들도 협상 테이블에서 눈, 표정, 몸짓에 더 집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분명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경험하고, 또 경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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