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 SCM ≠ 상품매출 SCM
제조업과 유통업의 경계에 있는 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 우리는 직접 제품을 만들기도 했고, 해외 완제품을 수입해 판매하기도 했다.
첫 출근 날, 상사가 건넨 업무인수인계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제조 라인 - 국내 원자재: 원자재 조달, 생산 관리, 재고 관리
제조 라인 - 해외 원자재: 외자구매, 수입 통관, 원자재 재고 관리
상품매출 라인: 해외 완제품 발주, 수입 통관, 유통 관리
"어? 이거 완전 다른 일 세 개 아닌가요?"
"맞아. 근데 회사에선 같은 팀이야. 적응해봐."
그렇게 나의 '삼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달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아침마다 쏟아지는 알람들이 마치 세 개의 다른 회사에서 온 것 같았다.
국내 원자재 조달팀에서 온 메시지:
"A 원자재 재고 부족, 생산 중단 위기"
"B 공급사 품질 이슈 발생, 대체재 필요"
해외 원자재 수입팀에서 온 메시지:
"중국발 원자재 컨테이너 부산항 도착"
"인도 공급사 몬순 시즌으로 생산 지연"
상품매출팀에서 온 메시지:
"독일발 완제품 컨테이너 부산항 도착 지연"
"이탈리아 공급사 가격 15% 인상 통보"
"통관 서류 문제로 완제품 화물 보류 상태"
처음엔 이 모든 게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명백히 다른 우주였다. 특히 완제품을 다루는 상품매 매출 라인은 원자재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문제들을 쏟아냈다.
국내 원자재는 가장 쉬워 보였다. 같은 나라, 같은 언어, 같은 시간대.
즉시 대응 가능: 오전에 전화하면 오후에 샘플 도착. 품질 문제가 생기면 바로 공장으로 달려갈 수 있다.
관계 중심: "사장님, 가격 좀 봐주세요. 우리 사이 아니에요." 같은 인간적인 협상이 통한다.
하지만 국내 시장의 한계라는 명확한 족쇄가 있었다. 특수 원자재 공급사가 단 두 곳뿐일 때, 그들의 담합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오는 순간, 모든 것이 기술과 데이터의 영역으로 바뀐다.
품질 검증이 생명: 샘플과 본품의 미세한 스펙 차이가 최종 생산품의 품질을 좌우한다. 중국에서 수입한 화학 원자재의 로트(Lot)가 달라 생산 라인이 2주간 멈췄던 끔찍한 기억이 있다.
생산 일정과의 연동: 원자재 입고가 하루 늦어지면 공장 전체가 멈춘다. 모든 프로세스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했다.
해외 완제품을 수입하는 것은 원자재와는 차원이 다른 스트레스였다. '블랙박스'를 여는 기분과 같았다. 우리는 생산 과정에 전혀 관여할 수 없고, 오직 결과물만 받을 뿐이다.
워크플로우:
트렌드 조사 → 해외 발주 → 2개월의 기다림 (블랙박스) → 통관 → 창고 입고 → "이게 뭐지?"
독일에서 수입한 의료기기 사건은 아직도 생생하다. 카탈로그에서 본 제품과 실제 도착한 제품이 달랐다. 색깔, 버튼 위치, 심지어 로고 디자인까지. 공급사는 "신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다"며 사전 고지 없이 보낸 거였다.
이미 마케팅팀은 구버전 이미지로 모든 홍보물을 제작한 상태였다.
"이거 완전 다른 제품인데요?"
"그럼 다시 주문해요?"
"2개월 걸리는데요?"
"그럼... 이걸로 어떻게든 팔아봐요."
원자재는 스펙이 다르면 '불량'이지만, 완제품은 디자인이 다르면 '신버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제조사가 아니라 유통사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결국 "성능 개선 리뉴얼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팔아야 했다.
국내 원자재 재고: 부족하면 비싸게 당일 주문이라도 가능하다. 스트레스 레벨 ★★☆☆☆
해외 원자재 재고: 부족하면 생산 라인이 멈춘다. 최소 1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스트레스 레벨 ★★★★☆
수입 완제품 재고: 부족하면 매출 기회가 그대로 사라진다. 너무 많으면 유행이 지나 악성 재고가 된다. 스트레스 레벨 ★★★★★
특히 완제품 재고는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 그대로 손실로 이어진다. 계절성 의류를 수입했는데 그해 날씨가 정반대라면? 그 재고는 다음 해까지 창고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된다.
드디어 이해했다.
국내 원자재 SCM = 전통적인 구매 담당자 (핵심 역량: 협상력, 관계 관리)
해외 원자재 SCM = 테크니컬 바이어 (핵심 역량: 기술 이해도, 품질 관리)
상품매출 SCM = 머천다이저(MD) 겸 수입 오퍼레이터 (핵심 역량: 트렌드 감각, 마케팅 이해도, 무역 실무)
회사는 편의상 우리를 SCM팀으로 묶어뒀지만, 실상은 세 개의 다른 직종을 한 사람이 감당하는 셈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경험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입체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국내 조달의 속도감, 해외 원자재의 정밀함, 그리고 상품 매출의 시장 감각까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회사에서는 여전히 우리를 "SCM 담당자"라는 하나의 직책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세 가지 다른 전문성이 필요한 일을 한 사람이 다 해야 하는 현실이 때로는 버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