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시간에 대한 사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내 일의 깊이도 다 알기 어려운데, 과연 나는 이 세상을 얼마나 이해하며 살고 있을까. 금융, 제조, 예술, IT... 수많은 산업군은 각자의 언어와 생리로 굴러가고, 그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전문성을 쌓아 올리며 살아갑니다.
나와 다른 분야의 이야기는 그저 뉴스 헤드라인 너머의 막연한 세상일 뿐이었죠.
변화는 생성형 AI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채용사이트에 들어가 회사와 JD를 보며 "도대체 이 직무는 어떤 일을 하는 걸까?" 하는 호기심에 빠집니다. 제가 하는 일과 교집합이 있는 분야도 있지만, 전혀 생경한 분야도 많았죠.
예를 들어, '애그리테크 스타트업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라는 공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농업과 데이터 분석이 어떻게 만날까 싶어 AI에게 물었더니,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위성 데이터를 활용한 작물 생육 예측, 토양 센서 데이터 분석을 통한 최적 관수 시점 산출, 기후 데이터와 수확량의 상관관계 모델링까지. 단순히 '농업에 AI를 접목한다'는 막연한 개념이 구체적인 비즈니스 프로세스로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뷰티테크 기업의 제품기획자' 포지션이 있었습니다. 화장품 회사의 기획자가 어떤 일을 할까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니, 소비자 피부 타입별 데이터 분석부터 시작해 성분 트렌드 리서치, 경쟁사 제품 벤치마킹, 제조 파트너와의 협업 프로세스, 론칭 전 테스트 마케팅까지 전체 제품 개발 사이클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심지어 각 단계별 소요 기간과 핵심 체크포인트까지 알 수 있었죠.
이런 경험이 반복되자, AI가 내놓는 답변의 깊이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업의 전문가가 느끼는 미묘한 감각이나 복잡다단한 의사결정의 깊이까지 담아내진 못했을 겁니다. '겉핥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겉핥기는 단순한 표면 핥기가 아니었습니다.
각 부서의 역할(R&R), 비즈니스의 전체적인 흐름, 수익 구조와 핵심 지표(KPI)까지, 마치 잘 정리된 비즈니스 케이스 스터디를 단 몇 초 만에 요약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관련 업계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술 한잔 사거나, 몇 날 며칠을 투자해 책과 자료를 뒤져야 어렴풋이 그릴 수 있었던 산업의 지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이었습니다.
'핀테크 스타트업의 컴플라이언스 매니저'는 어떤 일을 할까요? AI는 금융감독 규정 모니터링부터 내부 통제 시스템 구축, 리스크 평가 프로세스 설계까지 상세히 설명해 줬습니다. '헬스케어 AI 기업의 레귤러토리 어페어 전문가'는? FDA 승인 프로세스 관리, 임상시험 규제 대응, 의료기기 인증 업무까지 전문 영역의 세밀한 업무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경험이 반복되자, 저는 이것이 단순한 정보 검색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시간 여행'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인간이 타인의 경험을, 그것도 내가 원하는 방식과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 심도 있게 알게 된다는 것.
이는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AI의 답변은 누군가 하늘에서 뚝 떨어뜨려 준 지식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수십 년간 해당 분야에 몸담았던 전문가들이 쓴 글, 성공과 실패를 담은 보고서, 시장의 변화를 분석한 데이터 등 인류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경험의 총합이 담겨 있습니다. AI는 그 방대한 경험의 데이터를 학습해, 제가 궁금해하는 맥락에 맞춰 재구성해 주는 '경험의 증류기'인 셈입니다.
결국 저는 AI와의 대화를 통해, 다른 이들이 수년에 걸쳐 체득했을 지식의 정수를 단 몇 분 만에 맛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SCM,구매라는 한 우물만 파온 제게, 이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짧게나마 경험해보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게임 개발자의 치열한 런칭 준비 과정, 바이오테크 연구원의 실험실 일상, 핀테크 기획자의 규제 대응 고민까지. 평생 한 분야에서 일할 것 같은 제가 이렇게라도 여러 사람들의 직업적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전문성을 갖기도 벅찬 세상에서, 여러 산업의 생리를 넘나들며 간접 경험을 쌓는 것. 이는 명백히 시간을 압축하는 행위이자, 제한된 삶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이었습니다.
AI는 우리를 미래로 데려가는 공상과학 속 타임머신이 아니라, 인류의 과거와 현재 경험을 압축해 현재의 우리에게 전달하는 '경험의 타임머신'이었던 겁니다.
이 '타임머신'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요?
새로운 커리어를 고민하는 사람은 여러 직업의 현실을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습니다. '게임 개발사의 라이브 오퍼레이션 매니저'가 궁금하다면, 게임 출시 후 콘텐츠 업데이트 기획부터 유저 데이터 분석, 이벤트 기획, 매출 최적화까지 실무의 전체 그림을 그려볼 수 있죠.
창업을 꿈꾸는 이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다른 산업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더 넓은 시야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펫테크 스타트업을 구상한다면, 펫보험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부터 반려동물 헬스케어 시장의 규제 환경, 펫푸드 유통업계의 공급망 구조까지 연관 산업의 생태계를 미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투자를 고려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이오테크 기업에 관심이 있다면, 신약 개발 프로세스의 단계별 리스크와 소요 기간, 규제 승인 절차의 복잡성, 각 단계별 투자 규모와 성공 확률까지 업계의 기본 상식을 쌓고 판단할 수 있죠.
물론 간접 경험이 직접 부딪치고 깨지며 얻는 체화된 지혜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감, 예상치 못한 변수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역학 관계는 여전히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지' 때문에 시도조차 못 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줄일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업계 상식과 비즈니스 구조를 이해한 상태에서 도전할 수 있다면, 시행착오의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죠.
더 나아가, 이렇게 번 시간을 더 가치 있는 시도와 깊이 있는 경험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기초 지식을 습득하는 데 들였을 시간을 실제 실행과 검증에 투자하고, 핵심 역량을 기르는 데 몰두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모든 분야의 집단지성을 내 서재의 책처럼 손쉽게 꺼내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궁금한 직업, 관심 있는 산업, 투자하고 싶은 분야의 내부 구조를 몇 번의 대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질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 압축된 시간과 확장된 경험을 가지고 무엇을 해낼 것인가'로 바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채용공고를 보며 품었던 단순한 호기심이, AI라는 타임머신을 통해 인류의 축적된 지혜와 만나는 순간. 그 순간 우리는 100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도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탐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은 세상을 감싼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