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없는 기술력의 허상
매일 아침 출근해서 보는 풍경이 있다.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이 또다시 'R&D 로드맵'을 논의하고, CEO는 눈을 반짝이며 "이번 기술이 정말 혁신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영업팀장 얼굴은 어둡다. 고객사에서 또 주문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이런 회사에서 10년을 버텼다. 그리고 깨달았다. CEO가 연구원 코스프레를 멈추지 않는 한, 이 회사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박사 출신 CEO들을 많이 봤다. 논문 수십편, 특허 10여개를 자랑하지만 정작 매출 보고서는 읽지 못한다. 이들에게 회사란 '큰 연구실'이고, 직원들은 '대학원생'이며, 제품은 '논문'이다.
연구원의 세계: 완벽한 데이터, 논리적 증명이 목표다. 시간은 무제한이고(진리는 기다려준다), 실패는 새로운 가설을 위한 소중한 데이터다. 통제된 환경에서 변수를 조절하며 현상의 본질을 파고든다. 완벽함과 정확성이 미덕이고, 과정의 논리적 타당성이 결과만큼 중요하다.
사업가의 세계: 고객이 돈 낼 만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목표다. 시간은 한정적이고(캐시플로우가 떨어지면 끝), 실패는 회사를 죽이는 독이다. 시장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하며, 경쟁은 치열하고 고객은 냉정하다. 불확실성 속에서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 효율을 뽑아내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스타트업 CEO가 전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고객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해도 "아직 완벽하지 않다"며 출시를 미룬다. 시장이 "A 기능이 필요하다"고 해도 "B 기술이 더 혁신적"이라며 고집을 부린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에 과도한 애착을 갖는 '기술적 완벽주의'에 빠져 있다.
그 결과? 매출은 제자리, 투자금만 소진.
회계팀에서 가져온 재무제표를 보면 답이 나온다. 매출 100억인 회사와 10억인 회사의 차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시장과 소통하는 능력의 차이다.
매출이 나온다는 것은 고객이 우리 기술을 실제로 필요로 한다는 증거다. R&D부터 생산, 영업까지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린다는 신호다. 회사가 지속 가능하다는 시장의 인정이다. 이 숫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영업, 마케팅, 생산, 고객관리 등 기업의 모든 기능이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
반대로 매출이 없다는 것은 아무리 멋진 기술이라도 시장에서는 쓸모없다는 판정이다. 조직 내 어딘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경고다. 투자금 소진과 회사 종료라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는 신호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CEO가 "기술만 완성되면 매출은 따라온다"고 믿는다. 시장의 요구보다 기술적 구현의 완성도를 우선시하며, 제품 출시를 끝없이 미루거나 고객이 외면하는 불필요한 기능을 추가하는 데 자원을 낭비한다. 10년 현장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이는 위험한 환상이다.
요즘 스타트업 CEO들의 관심사는 하나다. "다음 투자 라운드를 어떻게 따낼까?"
시리즈 A로 30억, 시리즈 B로 100억, 시리즈 C로 300억... 투자금이 늘어날수록 기업가치도 따라 올라간다. 언론에서는 "유니콘 기업 탄생"이라고 떠든다. 최근 스타트업 생태계는 '매출 없는 성장'이라는 기이한 현상에 취해있다. 당장의 수익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벤처캐피털의 투자 논리가 확산하면서, 많은 기업이 내실을 다지기보다 투자 유치에만 목을 매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매출 10억도 안 되는데 기업가치 1000억"
이게 정상인가? 투자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시리즈 D, E가 되어도 매출이 나오지 않으면 결국 투자는 끊어진다. 그때 가서야 CEO들이 깨닫는다. "아, 매출이 진짜 중요했구나." 너무 늦었다. 이미 수백억을 태운 후다.
실제로 봤다. 총 누적투자 유치액 300억, 직원 90명의 스타트업이 매출 부족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것을. "혁신 기술"이라는 포장지를 벗기면 결국 매출 없는 기업은 사상누각이었다. 이러한 기업의 대표들은 사업 계획서 자료를 꾸미는 데는 능숙하지만, 실제 고객을 만나고 시장을 개척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매출'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좋아할 만한 '성장 스토리'와 '미래 비전'이다.
연구원 마인드 CEO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자.
고객을 모른다. "우리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무지한 고객들"이라고 생각한다. 고객 불만을 "기술적 이해 부족"으로 치부한다. 시장 조사보다 논문 검색이 먼저다. 고객의 피드백을 기술에 대한 몰이해로 여기고, 시장의 변화를 무시한 채 자신의 연구 과제에만 몰두한다.
조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업팀이 "고객이 이것저것 요구해요"라고 하면 "기술 완성되면 저절로 팔릴 거야"라고 답한다. 마케팅팀의 시장 분석 보고서는 '기술을 모르는 소리'로 치부하고, 영업팀의 고객 불만은 '까다로운 고객의 트집'으로 무시한다. 생산 효율화를 위한 투자는 '핵심 기술 개발'에 밀려 후순위로 밀려난다. 결과는? 영업팀 사기 저하, 이직 러시다.
시간의 가치를 모른다. "좀 더 연구하면 더 좋은 제품이..."라며 미룬다. "경쟁사? 우리 기술이 더 우수한데?"라고 안주한다. 그 사이 시장은 경쟁사가 선점한다. 이러한 불협화음 속에서 기업의 성장 동력은 서서히 꺼져간다.
이런 CEO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심정을 안다. 마치 골대 없는 축구경기를 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뛰어도 득점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리더 아래에서 회사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그럼에도 성공하는 스타트업 CEO들을 봤다. 이들의 공통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객 중심 사고(Customer Obsession)다. 매주 고객사를 방문한다. 고객 불만을 제품 개발 1순위로 반영한다. "고객이 원하는 것 =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언어가 아닌 '시장의 언어'로 소통한다. 어려운 기술 용어와 복잡한 데이터가 아니라, 고객이 얻게 될 가치와 효용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
매출 지향적으로 조직을 운영한다. 모든 회의에서 매출 현황을 공유한다. R&D 투자도 매출 기여도로 평가한다. "기술적 우수성 < 상업적 가능성"의 원칙을 지킨다. '나'가 아닌 '우리'를 이끄는 리더십을 갖췄다. 각기 다른 전문성을 가진 직원들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을 한다.
시장 타이밍 감각이 있다. 완벽한 제품보다 적절한 타이밍의 제품을 선택한다. 핵심 기능으로 빠른 시장 진입을 한다. 고객 피드백으로 지속적으로 개선한다. 연구실의 완벽주의를 버리고 시장의 현실을 직시한다. '완벽한 제품'이 아니라, 고객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는 '최소 기능 제품'으로 시장의 반응을 살피고,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유연함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가 쉬울까? 전혀. 20년간 연구자로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업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변하지 않으면 회사가 죽는다. 기술력 있는 연구원이 성공적인 사업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
스타트업에서 10년을 버티며 수많은 회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다. 성공한 회사와 실패한 회사의 차이는 단순했다.
성공한 회사: "시장이 왕이다"
실패한 회사: "기술이 왕이다"
CEO가 연구실에서 나와 현실을 마주할 때, 진짜 혁신이 시작된다. 고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매출이라는 숫자 앞에 겸손해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회사가 탄생한다. 연구, 생산, 영업, 마케팅 등 모든 부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이 조화롭게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하고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기업의 성공은 실험실의 성과가 아닌 시장의 평가로 결정된다. 아무리 위대한 기술적 발견이라도 매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업의 자산이 아닌 값비싼 취미에 불과하다. 진정한 기업가는 기술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는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돈으로 바꿀지, 어떻게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만들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다.
기술은 수단이다. 목적은 매출이다. 이걸 헷갈리는 순간, 회사는 망한다.
연구실 CEO여, 제발 문 좀 열고 나와라. 밖에 진짜 세상이 있다.
*이 글은 개인적 경험과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든 스타트업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