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와 스테이블 코인의 무역 대금 송
아직도 기억한다.
2000년대 중반, 첫 해외 거래를 위해 은행 창구에서 보낸 긴 오후들을.
신용장(L/C) 개설을 위해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가면, 나무늘보 뺨치는 은행 직원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감정하듯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보곤 했다.
"이 서류에 오타가 있네요. 다시 가져오세요."
"선하증권의 날짜가 L/C 조건과 하루 차이 나는데, 이것도 수정해야 합니다."
당시엔 그게 당연했다.
글자 하나라도 틀리면 수천만 원짜리 거래가 무산될 수 있었으니까.
L/C는 그런 '완벽함'을 요구하는 시스템이었다. 은행이 중간에서 보증을 서는 대신, 서류상의 완벽한 일치를 조건으로 했던 것이다.
그때는 송금에 2주가 걸리는 게 정상이었다.
개설은행에서 통지은행으로, 다시 서류 검토를 거쳐 SWIFT 망을 통한 송금까지.
그 사이 우리는 손톱을 깨물며 기다렸다.
혹시 서류에 하자가 있어서 거절되는 건 아닐까, 상대방이 정말 물건을 보냈을까 하는 불안감을 안고.
하지만 그 기다림에는 나름의 안전함이 있었다. 은행이 보증을 서는 거래였으니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UCP(신용장통일규칙)라는 든든한 룰도 있었고. 비록 번거롭고 비쌌지만, 그게 '제대로 된' 무역거래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젊은 후배들이 이상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형님, 이제 스테이블코인으로 송금하면 5분이면 끝나요."
"은행 수수료도 거의 안 나오고, 24시간 언제든 보낼 수 있어요."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암호화폐라니, 그런 불안한 걸로 사업 자금을 주고받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보여준 화면은 충격적이었다.
스마트폰에서 몇 번 터치하자 미국에 있는 거래처 계좌로 돈이 실시간으로 들어갔다는 메시지가 왔다. 수십 년간 당연하게 생각했던 '2주 기다림'이 '5분 완료'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요즘 신입사원들과 얘기하다 보면 세대 차이를 실감한다.
"L/C요? 그거 아직도 써요? 우리 거래처는 다 USDC로 받고 싶어 하는데..."
"은행 가서 서류 검토받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해요? 블록체인에서는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게 투명하게 기록되는데..." 그들에게는 지갑 주소 하나면 전 세계 어디든 송금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은행 영업시간을 따져가며 L/C 개설 일정을 잡는 우리가 오히려 구식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도 큰 거래나 신규 거래처와는 L/C를 쓴다는 말은, 어쩌면 익숙한 과거에 대한 미련이자 마지막 변명일지도 모른다. '은행이 보증하는 거래'라는 안정감은 사실, 막대한 수수료와 시간을 지불하고 얻는 값비싼 보험에 불과했다. 우리는 안전이 아니라, 그저 은행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느리고 비싼 절차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빠른 송금 수단이 아니다. 이는 신뢰를 형성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파도다. 은행의 존재 이유는 '신뢰의 중개'였지만, 이제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더 저렴하고, 더 빠르고, 더 투명하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각국의 규제나 해킹 같은 리스크는 시간이 해결할 기술적 문제일 뿐,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순 없다.
결국 지금은 과도기가 아니다. 한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는 중이다. 신입사원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구식이 아니라, 곧 사라질 공룡이다. 은행 창구에서 L/C 서류를 뒤적이던 그 기나긴 오후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풍경이 될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
은행이 지배하던 금융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