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와 구매

멋진 마케팅 단어만은 아니더라.

by 구매가 체질

이것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외국계 대기업에 제품을 제조해서 납품하던 회사를 다닐 때의 기억이다.


신입 시절을 제외하고는 200명 미만의 작은 기업에서만 구매업무를 해왔다.

내 세계는 명확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들의 품질 기준을 맞추고, 본사에서 승인한 목표가에 근접시키고, 대륙을 건너가는 물류 시간을 계산해 정확한 납기를 지키는 것. 품질(Quality), 비용(Cost), 납기(Delivery). 이 세 가지가 내 업무의 전부였고, 실력을 증명하는 유일한 잣대였다. 본사에서 날아온 컴플레인 하나 없이 분기 마감을 끝내는 날이면, 혼자 조용히 어깨를 으쓱했다. 작은 우리 회사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응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것이 내 존재 이유였으니까.


ESG라는 단어는 그들, 즉 고객사의 입에서 처음 들었다. 본사에서 진행하는 '공급망 파트너 교육' 같은 웨비나 자료에서나 보던 단어였다. '인권(Human Rights)', '환경(Environment)', '윤리(Ethics)'...


솔직히 '저런 건 본사가 있는 유럽이나 미국 얘기지' 하고 선을 그었다. 우리 같은 한국의 작은 제조 협력사는 그저 생존이 먼저였다. 그들이 요구하는 완벽한 품질의 제품을 제때 만들어 보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압박은 한국 지사에 있는 내 카운터파트, 즉 그들의 구매 담당자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그에게서 이메일 한 통이 왔다. 제목은 영어로 'Request for Signature: Supplier Code of Conduct'였다. 늘 받던 발주서(Purchase Order)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파일이었다. 사장님께 보고드렸더니 "그 친구들 또 본사에서 뭐 내려왔나 보네. 문제없으면 도장 찍어서 보내줘요"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저 그들만의 글로벌 규정에 따른, 또 하나의 서류 업무가 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숙제'는 점점 구체적이고 집요해졌다. '산업안전보건 관련 자체 점검표(Self-Assessment Questionnaire)', '에너지 사용량 데이터'. 저는 미칠 노릇이었다. 사장님은 내게 "그래서 이번 분기 단가 협상은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데, 고객사는 내 핵심 업무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글로벌 본사의 기준을 들이밀고 있었다.


총무팀(요즘은 컬처팀이라고 해야하나?)에 물어봐도, 공장장님께 여쭤봐도 "우리가 그런 걸 따로 관리하던가?" 하는 반응뿐이었다. 결국 제가 직접 현장을 돌며 그들이 요구하는 양식에 맞춰 보고서를 꾸며야 했다.


진짜 위기는 연말, 실적 평가 시즌에 찾아왔다. 고객사로부터 받은 '협력사 종합 평가표(Supplier Performance Review)'. 나는 그 문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익숙한 '품질', '가격', '납기' 항목들 아래에,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ESG)'이라는 낯선 항목이 떡하니 큰 배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회사의 점수는 처참했다.


가장 뼈아팠던 것은, 늘 우리와 경쟁하던 그 회사의 약진이었다. 그 회사 담당자는 이미 1년 전부터 이런 글로벌 동향을 감지하고 'ISO 14001' 같은 국제 표준 인증을 준비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눈앞의 단가를 깎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사장님께 이 평가표를 들고 가서 보고드려야 했다. "본사 방침이랍니다. 이 ESG 점수 때문에 내년도 물량 배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사장님의 굳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선은 마치 '자네, 글로벌 기업 상대하는 담당자로서 뭘 한 건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내 지난 경력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내 역할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단순히 '싸게 잘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대한 글로벌 공급망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무역장벽이 될 수도 있는 비재무적 위험을 가장 먼저 읽고, 우리 회사가 살아남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장님께 '이건 비용이 아니라, 저 거대한 회사와 계속 거래하기 위한 자격증입니다'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거래하는 국내 협력업체들을 만날 때도 질문이 바뀌었다. "그래서 단가는요?"가 아니라 "혹시 귀사도 저희 고객사 같은 글로벌 기업에 납품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런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먼저 묻기 시작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구매 담당자의 역할은 이제 회사의 경계를 넘어, 우리와 연결된 모든 파트너들과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는 전략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 명함에 찍힌 '구매'라는 직함의 무게가, 어제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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