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돈이 좀 도는 것 같다.

벤처 업계 현직자가 데이터로 본 시장의 진실

by 구매가 체질

벤처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요즘 동료들과 만나면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는 지난 건가? 요즘 돈이 좀 도는 것 같아." 혹한기라 불리던 지난해를 생각하면 분명 시장에 온기가 돌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곤 합니다. 단순한 기분 탓일까요? 아니면 정말 대한민국 벤처 투자 시장에 다시 활력이 돌고 있는 걸까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발표된 시장 분석 자료를 깊이 들여다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돈은 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똑똑하고 강력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숫자가 증명하는 명백한 회복세

시장이 V자 회복을 그리고 있다는 건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2023년의 조정기를 거쳐 2024년부터 뚜렷한 반등이 시작됐고, 올해는 그 흐름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2025년 1분기 신규 투자액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34% 급증했습니다.

앞으로 투입될 실탄을 의미하는 신규 펀드 결성액 역시 21% 증가하며 미래를 밝혔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런 회복세가 글로벌 시장의 위축세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해도 월등한 성과를 보이며 대한민국 벤처 생태계만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 그리고 어디에 투자하고 있을까?

시장에 돈이 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이제 그 돈의 출처와 행선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1.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의 전환


과거에는 정부의 정책 자금이 시장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민간 자본이 시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특히 연기금, 공제회, 그리고 일반 기업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돈의 양이 늘어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기업들은 단순한 재무적 이익을 넘어 자신들의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스타트업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스마트 머니'의 유입은 스타트업에게 단순한 자금을 넘어 사업 협력과 성장 기회를 제공하는 셈입니다.


2. 다시, 모든 것의 시작 '초기 단계'로


시장이 과열되면 보통 안정적인 후기 단계 기업으로 돈이 몰리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창업 3년 이내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가 무려 81.7%나 급증했습니다. 이는 투자자들이 고평가 논란을 겪으며 학습을 마쳤고, 더 큰 성장의 과실을 얻을 수 있는 초기 단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건강한 생태계의 선순환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3. 돈의 흐름은 'AI'와 '바이오'로 향한다


그렇다면 이 똑똑한 돈들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시장의 흐름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단연 'AI'와 '바이오·헬스케어'입니다.


뤼튼테크놀로지스, 퓨리오사AI 같은 AI 기업들이 조 단위의 가치를 인정받고, 셀락바이오 같은 신약 개발 스타트업이 초기부터 거액의 투자를 유치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벤처 생태계가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 경쟁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원천 기술, 즉 '딥테크(Deep Tech)'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질적인 변화입니다.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르다: 남겨진 숙제, '엑시트(Exit)'


분명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지만, 이 모든 사이클이 완성되려면 마지막 퍼즐이 필요합니다. 바로 '엑시트', 즉 투자금 회수 시장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유입되어도, 그 돈이 IPO나 M&A를 통해 회수되고 다시 새로운 혁신에 재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없다면 언젠가는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엑시트 시장, 특히 M&A 시장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초기 단계 투자는 넘쳐나는데 출구가 좁다면, 수년 내 '엑시트 병목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옵니다. "돈이 들어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돈이 성공적으로 회수되어 다시 들어올 수 있는가?"라는 더 중요한 질문에 답해야 할 때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즘 돈이 돈다"는 우리의 체감은 사실이었습니다. 시장은 혹한기를 지나 재조정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이 활력이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생태계의 마지막 관문인 '엑시트 시장'의 활성화에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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