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 경력직이라면, 초창기 스타트업은....

다시 생각하세요

by 구매가 체질

혹한기라 불리던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다시 훈풍이 불고 있습니다. 최근의 금리 인하 기조와 더불어,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육성 등 강력한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벤처 캐피털의 자금이 다시 한번 스타트업 생태계로 수혈되고 있습니다.


'제2의 벤처 붐'이 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 속에, 많은 경력직 인재들이 다시 한번 '로켓 성장'의 꿈을 안고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 체계적인 구매/SCM 업무를 경험한 N년차 경력자라면, '내가 가진 노하우로 이 회사의 구매 시스템을 멋지게 구축해 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구매'라는 명확한 직무 경력을 쌓아왔다면, 이 뜨거운 분위기에 휩쓸리기 전 잠시 멈춰야 합니다. 특히 자금이 막 유입되기 시작한 '초창기' 스타트업(시드, 시리즈 A 단계)으로의 합류는 심각하게 다시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이 당신의 높은 연봉을 감수하고서라도 '구매 경력직'을 뽑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부 통제(Internal Control)'나 '조달 위험(Supply Chain Risk)'을 선제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일까요? 안타깝게도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초창기 스타트업 멤버들은 구매 경험이 전무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 '구매'란 그저 '업체 상대하고 견적서 받고 주문하는 귀찮은 일'일 뿐입니다. 그들은 전략적 구매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이 귀찮고 번거로운 '허드렛일'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대치의 불일치 속에서 당신의 빛나는 구매 경력이 독이 될 수도 있는 3가지 이유입니다.


1. 거기는 '시스템'이 아닌 '실험실'입니다. (특히 하드웨어)


구매 경력자의 핵심 역량은 프로세스 구축최적화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공급사를 소싱하고, 평가하며(SRM), 계약을 체결하고, 비용을 절감하며, 재고를 관리할지(ERP/SCM)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이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지만 초창기 스타트업은 '시스템'이 아니라 '생존'이 목표인 정글, 혹은 '실험실'입니다.

IT 기반의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이라면 그나마 낫습니다. 일단 개발하고, 디버깅하고, 고객의 소리를 들으며 개선해 나가면 됩니다. '린(Lean)'하게 움직이며 수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합류하려는 곳이 물리적인 제품(Hardware)을 다루는 곳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만약 회사가 아직 제품의 컨셉이나 잡고, 3D 프린터로 매번 바뀌는 샘플이나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있다면, 그건 아직 구매 전문가가 뛸 무대가 아닙니다. 그곳은 R&D의 영역이며, 당신은 그저 '시제품 제작용 부품 주문자'가 될 뿐입니다.


당신이 진짜 필요한 시점은, '금형(Mold)'을 만들기 직전입니다. 즉, 가능한 실험들은 되도록 끝나고 '이게 바로 우리 제품이다' 할만한 신뢰성 있는 제품이 나왔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드웨어는 현장에 나간 후 수습하는 비용이 소프트웨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못된 스펙으로 대량 발주가 나가면, 그 제품을 수습하기 위한 현지 비용(출장 체류비, 해외 지사 설립, 해외 운용 인력)으로 회사의 존폐가 갈릴 수 있습니다. IT처럼 '버그 패치'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설계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R&D의 뒤치다꺼리를 하거나,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스펙의 부품을 구하러 다니는 '소방수'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2. '바잉 파워(Buying Power)' 없는 구매는 무의미합니다.


구매 담당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협상력', 즉 '바잉 파워'입니다. 당신은 수십, 수백억 원의 물량을 무기로 공급사와 치열하게 밀고 당기며 원가를 절감하고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는 전문가입니다.

초창기 스타트업의 구매 볼륨은 얼마일까요? "사장님, 10개만 살게요." "이번 달엔 3개만 필요해요." 이 정도 수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의 화려한 협상 스킬은 쓸모가 없습니다. 공급사에게 당신은 '중요한 파트너'가 아니라 수많은 '소액 구매자 1'일 뿐입니다. 가격 네고(Nego)는커녕, 정해진 가격에 제때 물건을 받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결국 당신은 '전략적 구매 전문가(Strategic Buyer)'가 아닌, 단순히 주문서를 넣는 '발주 담당자(Order Placer)'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는 당신의 커리어에 심각한 정체, 혹은 퇴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3. '구매 전문가'가 아니라 '만능 해결사'가 됩니다.


초창기 스타트업은 직무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구매 담당자'로 입사했지만, 당신이 하게 될 일은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사무실 비품 주문 (구매)

국책과제 관리(관리)

간식 및 커피 원두 채워 넣기 (총무)

랜선 설치 기사님 일정 잡기 (총무)

신규 입사자 노트북 세팅 (IT)

사무실 임대료 납부 및 법인카드 정산 (재무/회계)

(심지어) 면접 일정 조율 (인사)


회사는 아직 구매 업무 하나만으로 정규직 1명의 인건비를 감당할 만큼의 볼륨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구매' 업무에 20%의 시간을 쓰고, 나머지 80%는 회사의 온갖 잡무를 처리하는 '경영지원팀' 혹은 '오퍼레이션 매니저'가 됩니다.


당신의 전문성은 빠르게 희석되고, 몇 년 뒤 이직 시장에 나왔을 때 "구매 전문가로서 지난 몇 년간 무엇을 하셨나요?"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매 경력자는 스타트업에 가면 안 될까요?


아니요.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당신의 구매 전문성이 폭발적으로 필요한 시기는 회사가 '초창기'를 지나 '스케일업(Scale-up)' 단계에 진입했을 때입니다.

시리즈 B, C 투자를 받으며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월 구매액이 수억 원을 넘어서며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

(하드웨어의 경우) 신뢰성 있는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어, 대량 생산을 위한 '금형' 제작과 '양산'을 준비할 때

주먹구구식 구매로 인해 비용 누수가 심각해질 때


이때가 바로 당신 같은 '시스템 빌더'가 영웅처럼 등장할 타이밍입니다. 당신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잡고, 낭비를 줄이며, 회사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구매 경력자 여러분, 당신의 전문성은 매우 귀합니다. 그 귀한 무기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초창기 스타트업에서 녹슬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역량을 100% 발휘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타이밍'의 회사를 찾으시길 진심으로 조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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