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 표준원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구매팀의 시계는 누구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11월, 12월. 남들은 한 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우리는 이미 내년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사업계획과 표준원가 수립의 시즌이다.
많은 실무자들이 이 시기가 되면 엑셀을 켜두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수천, 수만 개의 자재 품목들. 이 방대한 데이터 앞에서 우리는 종종 달콤한 유혹에 빠진다.
"작년 단가에 물가상승률 3%만 일괄 적용해서 넘길까?" "어차피 환율은 신의 영역이니, 경영계획 환율 그대로 쓰자."
하지만 16년 차 구매쟁이로서 단언컨대, '복사+붙여넣기'로 만든 표준원가는 반드시 내년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영업이익률 하락이라는 성적표를 들고 말이다.
오늘은 특정 산업을 불문하고, 구매 담당자가 내년도 표준원가를 수립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3가지 원칙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표준원가 수립의 핵심은 에너지 분배다. 모든 품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파레토 법칙(80:20 법칙)을 꺼내 들어야 한다.
전체 구매 금액의 80%를 차지하는 상위 20%의 핵심 자재(Group A). 이 녀석들만큼은 '작년 데이터'가 아니라 오늘의 시장 데이터로 다시 세팅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이슈는 없는가?
원자재(Raw material) 가격 추이는 어떠한가?
벤더가 은근슬쩍 가격 인상 공문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머지 자잘한 소모품(Group C)들은 거시적인 물가상승률로 방어하더라도, 회사의 이익을 좌우하는 핵심 자재만큼은 담당자가 직접 시장을 조사하고, 벤더와 통화하며 획득한 살아있는 정보를 숫자에 녹여내야 한다.
"내년에 많이 오를 것 같아요." 라는 말은 회의실에서 통하지 않는다. 경영진과 영업팀은 근거를 원한다.
과거에는 공급사 웹사이트를 일일이 들어가 가격을 확인하는 것이 '노가다'였다면,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나는 최근 파이썬(Python)과 같은 도구를 활용해 주요 자재의 실시간 시장가를 자동으로 수집(Crawling)하고 분석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현재 경쟁사 A몰, B몰의 평균 가격이 전년 대비 7% 상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표준원가도 최소 5%의 안전마진(Buffer)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렇게 외부 데이터를 들이미는 순간, 표준원가는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시장 상황을 반영한 전략 지표가 된다. 기술을 활용해 단순 반복 업무를 줄이고, 그 시간에 시장을 분석하는 것. 이것이 요즘 시대 구매 담당자의 경쟁력이다.
영업팀은 항상 낮은 원가를 원한다. 그래야 판가를 낮춰 수주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구매팀이 섣불리 원가를 낮게 잡아주면, 나중에 실제 구매가 발생했을 때 발생하는 불리한 차액(Variance)은 고스란히 회사의 영업이익을 갉아먹는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자재라면, 환율 리스크는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변수다. 단순히 현재 환율을 넣는 것이 아니라, 내년도 국제 정세와 금리 변화를 고려한 '구매 안전 환율'을 설정해야 한다.
표준원가를 보수적으로(약간 높게) 잡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회사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안전벨트를 매는 행위다.
우리가 엑셀 칸에 채워 넣는 숫자 하나하나는 내년 한 해 동안 우리 회사가 감당해야 할 무게다. 그렇기에 그 숫자는 관성이 아닌 치열한 고민과 분석 끝에 나와야 한다.
지금 엑셀을 켜둔 전국의 모든 구매 담당자분들께 응원을 보낸다.
부디 당신의 표준원가가 내년 회사를 지키는 튼튼한 방패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