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의 영역을 '데이터'로 보정하는 구매쟁이의 기술
이맘때쯤 회사는 일종의 '집단 최면'에 걸린다.
내년도 사업계획을 확정 짓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회의실 스크린에는 우상향 하는 아름다운 그래프가 띄워지고, 영업팀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내년 시장 상황이 좋습니다. 매출 목표 2배, 충분히 달성 가능합니다."
경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한다.
모두가 '성장'이라는 달콤한 꿈에 취해 있을 때, 유독 표정이 굳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 숫자에 맞춰 원자재를 사 오고, 공장을 돌리고, 재고를 떠안아야 하는 우리, SCM 담당자들이다.
나에게 11월은 '희망'을 노래하는 달이 아니다.
영업의 막연한 낙관을 데이터라는 칼로 해부하여 냉정한 현실로 재조립해야 하는, 고독한 검증의 시간이다.
영업의 목표(Target)와 SCM의 예측은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영업은 '팔고 싶은 의지'를 숫자에 담고, SCM은 '팔릴 수밖에 없는 확률'을 숫자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의지'가 여과 없이 자재 발주로 이어질 때 발생한다. 영업팀의 "내년에 대박 납니다"라는 말만 믿고 수십억 원어치 원자재를 선발주했다가, 1년 뒤 창고 가득 쌓인 악성 재고를 보며 한숨 쉬어본 경험. 구매 밥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트라우마다. 재고는 곧 잠겨버린 현금이고, 회사의 동맥경화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우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하지만 영업팀이 건네준 소설책을 그대로 믿는 바보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싸우자는 게 아니다. '감(Feeling)'의 영역을 '과학'으로 보정해 주자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엑셀을 넘어 파이썬과 빅데이터 도구들이 우리의 무기가 되어주고 있다.
실무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3단계 예측 보정 프로세스를 거친다.
1. 과거의 편향(Bias)을 수치화하라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영업팀의 '과거 성적표'를 떼보는 것이다. 지난 3년간 그들이 11월에 예측했던 계획(Plan)과 실제 실적(Actual)을 비교해 본다.
"A 영업팀은 역사적으로 항상 실제보다 15% 높게 예측하는 경향(Positive Bias)이 있다.
" 이 데이터가 있으면, 그들이 가져온 숫자에서 15%를 걷어내는 것은 '비관'이 아니라 통계적 '보정'이 된다.
2. 시계열 모델로 베이스라인을 잡아라
단순히 전년 대비 몇 % 성장으로 계산하는 건 위험하다. 우리 회사의 제품이 계절을 타는지, 특정 주기로 사이클이 도는지 파악해야 한다.
최근에는 파이썬의 Prophet 이나 머신러닝 라이브러리를 활용해 본다. 인간의 편견이 배제된 기계적 예측값을 뽑아보면, 영업팀의 숫자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혹은 타당한 것인지 객관적인 벤치마크가 생긴다.
3. 협업을 통한 최종 합의
데이터 분석 결과, 기계는 100을 가리키는데 영업은 150을 주장한다고 치자. 이때 SCM은 50의 gap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를 요구해야 한다.
"신규 계약 건이 확정되었나요?", "프로모션 예산은 잡혀 있나요?" 이 치열한 질의응답 과정을 거쳐 합의된 숫자만이 비로소 '발주서'에 찍힐 자격을 얻는다.
물론, 아무리 정교한 모델을 돌려도 미래는 100% 맞출 수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예측은 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SCM의 실력은 '정확도'보다 틀렸을 때의 대응 능력에서 판가름 난다. 예측이 빗나갈 확률(표준편차)을 계산하고, 딱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안전 재고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회사를 위해 지불하는 보험료다.
11월의 늦은 밤, 나는 오늘도 모니터 앞에서 파이썬 코드를 돌리고 엑셀 시트와 씨름한다. 누군가는 우리를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라고 타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확신한다.
모두가 뜨겁게 낙관할 때, 차갑게 의심하고 검증하는 우리의 냉정함이 있기에, 회사는 내년이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의 '의심'은 회사를 향한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애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