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 how r u? I'm fine thank you, Andrew?
Hi, I'm CJ from XXX. Regarding the PO #1234, I'd like to..."
십수 년 전, 해외 공급사와의 첫 통화를 앞두고 밤새 예상 질문과 답변을 영어로 달달 외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메일 한 통을 보내기 위해 번역기와 사전을 몇 번이고 뒤적이며, 더 정중하고 정확한 표현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창한 외국어 능력'은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몸값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실시간 통역 이어폰이 어색하지 않고, 클릭 한 번이면 수십 페이지의 외국어 문서를 단 몇 초 만에 번역해 주는 시대입니다. AI 기술은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우리 손안의 스마트폰 앱처럼 당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외국어 능력은 필요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AI가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있는 지금, 구매 및 SCM 전문가의 ‘진짜’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단순히 '영어 좀 하는' 인재를 넘어, AI도 대체할 수 없는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역량, 바로 '이것'에 대해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AI가 제공하는 완벽에 가까운 번역은 때로 위험한 환상을 심어줍니다. 바로 ‘완벽하게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이죠. 비즈니스의 성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정보는 단어 그 자체에 담겨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단어를 둘러싼 맥락, 보이지 않는 의도, 그리고 미묘한 감정의 결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죠.
누구나 겪을 법한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중요한 부품의 납기를 앞당겨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해외 공급사가 메일로 이렇게 답합니다. “We will consider it positively.”
AI 번역기는 이 문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라고 100% 정확하게 번역해 줍니다. 하지만 이 ‘긍정적 검토’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문화권에서는 사실상의 정중한 거절을 의미하고,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결재 라인이 복잡하니 시간이 좀 걸린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혹은 정말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강력한 긍정의 의미일 수도 있죠.
AI가 제공하는 ‘정보의 평탄함’ 뒤에 숨겨진 ‘의도의 입체성’을 파악하는 것. 상대의 단어 너머에 있는 문화적 배경과 업무 스타일을 읽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술이 결코 해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입니다.
팬데믹, 전쟁, 물류 대란…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위기가 비즈니스의 ‘상수’가 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기업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대체 공급사를 빠르게 찾아내는 정보력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관계의 밀도’와 ‘신뢰의 깊이’가 그 어떤 데이터보다 중요해지는 순간입니다.
AI는 위기 상황에서 수백 개의 잠재 공급사 리스트를 순식간에 뽑아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리스트 속에서 어떤 파트너가 “당신네 사정이 어려우니 우리가 손해를 좀 보더라도 돕겠다”며 손을 내밀어 줄지는 알려주지 못합니다.
결국 모든 공급망(Supply Chain)의 근간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망(Trust Chain)이 있습니다. 이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은 ‘효율’이나 ‘비용’의 언어로는 쌓을 수 없습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꾸준한 관심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언어로만 구축될 수 있습니다. 위기는 바로 이 신뢰망의 견고함을 시험하는 무대와 같습니다.
과거 구매/SCM 전문가의 역할은 좋은 조건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무게 중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역할의 정의가 바뀌고 있습니다. 반복적인 거래와 정보 비교의 영역은 점점 더 AI에게 넘어가고, 인간 전문가는 지속 가능한 ‘관계’를 설계하는 역할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달라져야 합니다. ‘어디가 가장 싼가?’가 아니라, ‘어떤 파트너와 협력해야 우리 생태계 전체가 더 건강해지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부품의 스펙이 무엇인가?’를 넘어, ‘이 파트너와 어떤 협력 구조를 만들어야 얘기치 못한 위기에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는 눈앞의 숫자 너머를 보는 통찰력의 영역이며,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조율해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의 영역입니다. 단순히 점들을 잇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의 별자리를 그려내는 ‘가치 설계자’의 일입니다.
AI 시대에 우리가 길러야 할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깊은 ‘지혜’에 가깝습니다. 정답을 찾는 능력보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첫째, 깊게 듣는 기술입니다. 상대방의 단어보다 그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화려한 제안서보다 그의 망설이는 표정을 읽으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통의 90%는 언어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입니다. AI가 내놓은 번듯한 답을 그대로 믿는 대신, 그 답의 이면을 파고드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우리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리스크는 없을까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더 도와드려야 할까요?” 와 같은 질문들이 상황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셋째, 관계를 설계하는 시각입니다. 모든 비즈니스 파트너를 일회성 거래 상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단기적인 이익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장기적인 신뢰라는 자산을 쌓아가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할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가치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AI가 우리의 훌륭한 도구가 되어줄 이 시대에, 부디 기술의 주인이 되어 ‘진짜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전문가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