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담당자의 고해

정말 내가 한 일일까?

by 구매가 체질

— KPI와 시장의 소리

분기마다 돌아오는 KPI 설정과 성과 검토 시즌.
그때마다 나를 둘러싼 수치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매비용 절감률, 납기준수율, 공급업체 평가점수…

이 모든 수치들은 회사가 나에게 기대하는 ‘성과’의 지표이자, 동시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 고요한 회의실 속에서, 내 안쪽에선 늘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이게 정말 내가 한 일에 대한 걸까?”


—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흔들리는 수치들

구매팀은 기업 내에서 꽤 독특한 위치에 있다.
생산과 물류, 재무와도 맞닿아 있고, 동시에 외부 시장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서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계획하고 전략을 짜도,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쟁은 단순히 한반도와는 동떨어진 일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유가 급등, 에너지 비용 증가, 원자재 가격 폭등…
이 모든 변화는 빠르게 우리 회사의 구매단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성과지표에 그대로 반영된다.
“구매비용 절감률이 하락했다.”
“원자재 단가가 상승했다.”
그러자 회의실 안은 조용해지고, 눈길은 나에게 향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이게 정말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


—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공급업체와의 협상, 조건 개선, 대체품 개발, 발주 타이밍 조절…
그 모든 걸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원화 약세, 중국의 봉쇄, 미국의 금리인상, 산업 라인의 단절…
이런 외부 변수들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회사의 구매비용을 끌어올린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시스템 안에서는 ‘성과’라는 말보다 ‘운’이라는 말이 더 가깝지 않을까.


— 책임과 한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구매는 결국, 시장의 파도 속에서 배를 이끄는 일이다.
파도가 높다고 선박이 항로를 버릴 수는 없는 법.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파도를 읽는 눈을 가지는 것이다.
시장 동향을 분석하고, 리스크를 예측하며, 대안을 준비하는 것.
가격이 오를 걸 알면서도, 최대한의 손실을 줄이기 위한 전략을 짜는 것.

그리고 때로는, 수치가 말해주지 않는 이야기를 회사에 전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노력해서 줄일 수 있는 비용이 아니에요.”
“이건 시장 전체의 변화에 따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과 중심의 조직 문화 속에서는, ‘이유’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늘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내 일이 더 잘 보이게 될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건,


내 일이 진짜 ‘보여야’ 하는 것일까?


— 성과가 아닌 가치

내가 생각하는 구매의 진짜 가치는,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시장이 급변했을 때,
가장 먼저 대응할 수 있는 선제적 대응력이다.

물가가 폭등했을 때,
우리가 가진 공급망을 최대한 유지하고,
가능한 한 최소한의 손실로 납기를 지키는 것.
그건 단순한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KPI는 그렇게 생겼다.
보여주기 쉬운 것만을 담아내고,

보이지 않는 노력과 가치는 묻혀버린다.


— 내가 바라는 변화

내가 바라는 건,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비용 절감’이라는 수치로만 평가받지 않길 바란다.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력, 리스크 관리 능력, 협업과 전략적 사고까지,
그 모든 것이 구매담당자의 진짜 역량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시장이 내 성과를 뒤엎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해 주는 조직을 바란다.


— 끝없는 고민과 함께

구매담당자로서의 나는,
항상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하나는 책임감,
다른 하나는 무력감이다.

시장 앞에서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부족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회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고민하는 이 시간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어떤 원자재 가격이 또 다시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내 성과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 묻고 싶다.
이게 정말 내가 한 일에 대한 걸까?

아니면,
이건 단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파도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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