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퇴물’이 아니라 ‘전성기’가 시작됐다

Forty sexy - 이렇게라도 위안을 갖는다.

by 구매가 체질

마흔이 넘어서자 부쩍 철학책에 손이 갔다. 문장 하나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실무를하는 팀장이다. 매일 키보드를 두드리고 보고서를 만들지만,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 고작 여섯살 정도 차이 나는 팀원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데, 나의 작업속도는 매우 느리게 느껴진다. ‘이제 나도 퇴물인가?’ 하는 자조 섞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 손은 느려졌을지언정, 내가 쓴 보고서와 기획안의 Backdata는 정확했다. 팀원들의 보고서에는 숫자가 틀렸거나 오타가 수두룩했다. 더럽게 빨랐지만...여러 변수를 종합해 리스크를 예측하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속도는 내주었지만, 결과물의 완성도는 아직 쓸만한 거 같다. 머쓱타드


이 ‘느려짐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 건, 뇌과학에 관한 놀라운 보고서를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흔의 뇌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두 가지 지능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지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이고, 다른 하나는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이다.


유동성 지능(Gf):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고, 패턴을 외우고, 빠르게 반응하는 능력이다. 순발력, 암기력, 계산 속도 같은 것들이다. 이 지능은 20대 후반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감소한다. 내가 젊은 팀원들보다 타자가 느린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결정성 지능(Gc): 평생에 걸쳐 쌓은 경험, 지식, 지혜를 통합하고 활용하는 능력이다. 어휘력, 통찰력,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이 여기에 속한다. 놀랍게도 이 지능은 40대와 50대에 최고조에 달하며, 심지어 그 이후까지도 발달한다.


우리가 40대가 되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는 건 유동성 지능의 자연스러운 변화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훨씬 더 강력한 무기, 즉 결정성 지능을 얻게 된다.


뇌는 단순히 늙는 게 아니라, 속도 중심에서 깊이 중심으로 운영 체제를 업그레이드하고 있었던 것이다.


뇌는 어떻게 더 똑똑해지는가?


수십 년간 수천 명을 추적한 시애틀 종단 연구(Seattle Longitudinal Study)는 이 사실을 명확히 증명했다. 언어 이해력, 공간 지각력, 추론 능력 등 대부분의 핵심 인지 능력은 중년기에 정점을 찍었다.


항공기 조종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더욱 흥미롭다. 나이 든 조종사들은 새로운 장비를 익히는 데 젊은 조종사들보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유동성 지능), 비행 중 충돌을 피하거나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결정성 지능)은 훨씬 뛰어났다. 그들은 속도 대신 정확성과 종합적 판단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마치 내가 타이핑은 느려도 보고서의 핵심을 꿰뚫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중년의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뇌 전체를 활용한다: 젊을 때는 특정 과제를 할 때 뇌의 한쪽 반구(주로 좌뇌)를 집중적으로 쓴다. 하지만 중년의 뇌는 마치 베테랑 지휘자처럼 좌뇌와 우뇌를 모두 동원해 문제를 해결한다. (이를 해롤드(HAROLD) 모델이라고 한다.)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니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훨씬 더 종합적이고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지식의 네트워크가 강력해진다: 뇌는 수십 년간 쌓인 경험과 지식을 정교한 스키마(schema), 즉 지식 꾸러미로 만들어 저장한다. 이 꾸러미가 많고 정교할수록,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더 빨리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개별 나무가 아닌 숲 전체를 보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마흔,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


이러한 뇌의 변화는 감정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연구에 따르면 중년의 뇌는 불필요한 자극에 덜 반응하고, 감정 조절 능력이 향상되며, 긍정적인 정보를 더 잘 기억하는 ‘긍정성 효과(Positivity Effect)’를 보인다.


젊은 날의 충동성과 불안함이 잦아들고, 마음이 더 차분하고 안정되는 것이다. 괜히 우리가 철학책을 들고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 게 아니다. 이는 뇌가 감정의 폭풍우를 잠재우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결과다.


결국 중년의 뇌가 겪는 변화는 '쇠퇴'가 아니라, 삶의 후반전을 더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뇌의 위대한 '전략적 재분배'다.


미래를 위한 ‘인지적 엔진 경고등’


물론, 중년기가 장밋빛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이 시기를 미래 뇌 건강을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결정적 창(prognostic window)'이라고 말한다. 자동차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는 것과 같다. 지금 당장 차가 멈추는 건 아니지만, 점검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훗날 큰 고장으로 이어진다는 신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선 안 된다. 뇌의 새로운 전성기를 마음껏 누리고, 건강한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과학이 제안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몸과 뇌를 함께 쓰는 운동을 하라: 달리기 같은 단순 유산소 운동도 좋지만, 테니스나 댄스, 무술처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반응해야 하는 ‘열린 기술(open-skill)’ 운동이 뇌의 보상 능력을 더 효과적으로 강화한다.


뇌를 계속 자극하라: 편안하고 익숙한 활동에만 머무르지 말자. 어려운 책을 깊이 읽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악기에 도전하는 등 뇌에 적절한 '인지 부하'를 주는 활동이 뇌의 가소성을 자극한다.


건강 습관을 확립하라: 충분한 수면, 건강한 식단, 스트레스 관리는 뇌 건강과 직결된다. 50세 이전에 확립된 건강한 생활 습관이 70세 이후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키보드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초조하지 않다.


나의 느려진 손은 쇠퇴의 증거가 아니라, 더 깊고 넓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속도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문제의 핵심, 사람의 마음, 그리고 삶의 방향 같은 것들 말이다.


마흔은 결코 퇴물이 되는 시기가 아니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구간, 속도 대신 지혜를 무기로 달리는 새로운 전성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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