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회사에선 뭘 살까?

나라면...

by 구매가 체질

내가 일하는 판교에는 유독 게임회사가 많다. 점심시간, 반짝이는 통유리 건물들 사이를 걷다 보면 이름만 대면 알 법한 N사, K사의 로고가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바이오와 로보틱스, 손에 잡히는 ‘제품’의 공급망을 짜던 나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매일 그 앞을 지나며 문득 궁금해졌다. ‘저 거대한 빌딩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개발자와 아티스트들. 그들이 최고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필요로 할 텐데… 저 안의 구매팀은 대체 무엇을 사고 있을까?’


호기심은 이내 검색으로 이어졌고, 아니나 다를까 여러 게임회사에서 구매 담당자를 뽑고 있었다. ‘담당업무: SW, 용역/외주, MRO 구매…’ 지난 16년간 내 이력서를 채워온 익숙한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게임회사’라는 낯선 울타리 안에서 그 단어들은 어딘가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내가 다루던 구매 품목 대부분은 공장의 효율성과 직결된 ‘재고자산(Inventory)이었다. 하지만 게임회사의 구매 목록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Intangibles)’이 대부분일 터. 문득 이런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재고와 싸워온 나의 경험이, 무형자산을 다루는 이곳에서도 통할까?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채용공고 앞에서, 나는 나만의 가상 면접을 시작했다.


미션을 재정의하다: ‘사는 일’이 아닌 ‘성공을 조달하는 일’


내가 만약 게임회사 구매팀에 합류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팀의 미션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구매팀의 역할은 단순히 요청받은 물건을 싸게 사는 부서가 아니다. 특히나 수많은 크리에이터와 개발자의 창의력이 핵심 자산인 게임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의 미션은 ‘개발자들이 오롯이 게임 개발에만 몰입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구축하고, 회사의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프로젝트의 성공을 조달(Procure)하는 것’이다.


이 미션 아래, 우리는 회사의 단순한 ‘비용 집행 부서’가 아닌, 가치를 창출하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살까?: 게임회사의 장바구니 엿보기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관리해야 할 ‘장바구니’에는 무엇이 담길까? 아마 크게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 게임의 심장, ‘개발과 제작’에 필요한 모든 것

S/W 라이선스: 언리얼(Unreal), 유니티(Unity) 같은 게임 엔진부터, 3ds Max, Maya, Adobe CC 같은 그래픽 툴, 그리고 Jira, Slack 같은 수많은 협업 툴까지. 라이선스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이다.

개발 외주 용역: 감동적인 BGM을 만들어 줄 사운드 스튜디오, 화려한 시네마틱 영상을 제작할 프로덕션, 버그를 잡아줄 전문 QA 회사까지. 최고의 전문 업체를 찾아내야 한다.

H/W 및 장비: 개발자들의 창의력을 뒷받침할 최신 사양의 PC와 노트북, 테스트를 위한 서버와 스토리지, 모션 캡처나 전문 녹음을 위한 특수 장비도 빼놓을 수 없다.


2. 게임의 뼈대, ‘인프라와 IT’

클라우드 서비스: 전 세계 유저들이 24시간 접속할 게임 서버를 운영하기 위한 AWS, Azure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는 이제 전기나 물처럼 필수적인 자원이다.

보안 솔루션 및 네트워크: 유저의 정보와 회사의 자산을 지키기 위한 방화벽, DDoS 방어 솔루션. 쾌적한 개발 환경을 위한 네트워크 장비들.

IDC(데이터 센터): 안정적인 서비스를 위한 심장부. 서버를 보관할 공간과 회선을 임대하는 일.


3. 유저의 마음에 닿기 위한, ‘마케팅과 사업’

마케팅 대행: 우리의 게임을 세상에 알릴 광고 대행사, 인플루언서와의 협업.

오프라인 행사: 지스타(G-STAR) 같은 게임 쇼 참가나 유저 간담회를 위한 부스 설계, 장비 렌탈, 행사 운영 대행.

IP 굿즈 제작: 게임 캐릭터를 활용한 피규어, 의류 등을 만들어 줄 제조업체 발굴.


4. 최고의 동료들을 위한, ‘경영지원과 MRO’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한 허먼 밀러 의자,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사무 환경, 그리고 재충전을 위한 맛있는 커피와 간식까지.


나라면 이렇게 일할 것이다: 3가지 핵심 원칙


자, 이제 장바구니는 확인됐다. 제조업의 구매와 가장 다른 점은, 금액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재고로 남는 ‘물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용역과 서비스’라는 것이다. 이는 구매의 관점이 ‘원가 관리’에서 ‘투자 관리’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라면 이 변화에 맞춰 다음 세 가지 원칙에 집중할 것이다.


첫째, 프로세스로 일한다. 스타트업 시절, 주먹구구식 구매 방식으로 개발 일정이 지연될 뻔했던 아찔한 경험이 있다. 게임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R&D 단계의 속도전부터 라이브 서비스의 안정성까지, 각 단계에 맞는 구매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ERP 시스템을 도입해 구매 요청부터 정산까지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고, 반복 업무는 자동화하여 팀원들이 더 중요한 ‘전략’에 집중하게 할 것이다. 특히 IP(지적재산권)와 같은 무형자산의 권리 귀속이 중요한 외주 계약에서는,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표준 계약 절차를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둘째, 데이터로 증명한다. “가장 많이 쓰는 소프트웨어는 무엇인가?”, “어떤 프로젝트에서 외주 비용이 초과되고 있는가?”, “클라우드 비용이 급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이 아닌 데이터로 답해야 한다. 과거 데이터 기반의 재고 분석으로 과잉 재고를 줄였던 경험을, 이제는 무형자산의 ROI(투자수익률) 분석에 적용할 것이다. 구매 데이터를 분석해 정기적인 리포트를 발행하고, 이를 통해 경영진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구매팀이 회사의 ‘조종실’ 역할을 하는 방법이다.


셋째,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 단순히 납품받고 대금을 지불하는 ‘거래처’ 관리를 넘어, 함께 성장하는 ‘핵심 공급사’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실력 있는 외주 스튜디오는 돈만 준다고 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공정한 계약, 원활한 소통,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쌓아야 한다. 이는 팬데믹으로 공급망이 마비되었을 때, 긴밀한 신뢰 관계 덕분에 위기를 넘겼던 나의 경험이 증명한다. 좋은 협력사는 최고의 위기관리 시스템이다.


가상의 업무일지를 써 내려가다 보니, 게임 산업은 분명 낯설지만 ‘구매’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어떤 산업이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발굴하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내며,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를 관리하는 일.


결국 이 모든 것은 비즈니스의 ‘성공’ 그 자체를 조달하는 일일 테니까.


언젠가 나의 이 상상이 현실이 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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