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해본 자만이 안다. 난 해봤zi.
새로운 ERP 시스템 도입은 조직에 큰 기대를 품게 한다. "이제 엑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어!", "실시간으로 재고 파악이 가능해지겠지?" 하지만 장밋빛 기대도 잠시, 모든 실무자는 '품목 마스터 등록'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좌절을 맛보게 된다.
ERP의 성공은 정확한 데이터에 달려있고, 그 데이터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품목'이다. 하지만 이 품목을 시스템에 등록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왜 그렇게 어렵고, 담당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단순한 데이터 입력 작업처럼 보이지만, 품목등록은 기업의 모든 활동이 응축된 '데이터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이다. 이 과정이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가장 큰 문제는 기업 내부에 품목을 부르는 통일된 기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영업팀: 고객이 부르는 이름 그대로 '10mm 십자볼트'
생산팀: 도면 규격대로 'M10-L50 일반볼트'
구매팀: 거래처 품번으로 'A-1234 볼트'
이 모든 것이 사실상 같은 품목을 지칭한다. 이런 중구난방식 명칭을 그대로 ERP에 등록하면 어떻게 될까? 똑같은 품목의 재고가 여러 개의 코드로 분산되어 잡히고, 결국 시스템은 정확한 재고 정보를 알려줄 수 없게 된다.
이는 Garbage In, Garbage Out 의 전형적인 예시다.
품목 분류체계는 단순히 이름을 통일하는 것을 넘어, 관리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이때 각 부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회계/기획: 원가 계산이 용이하도록 원가 성격으로 분류하길 원한다.
영업/마케팅: 매출 분석이 쉽도록 제품 라인이나 브랜드 중심으로 분류하길 원한다.
생산/품질: 공정 관리와 품질 추적을 위해 자재의 종류와 규격에 따라 분류하길 원한다.
모두의 요구를 100% 만족시키는 분류체계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프로젝트는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많은 경영진과 실무자가 품목등록을 ERP 도입 초기에 한 번만 하면 끝나는 일회성 작업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품목은 신제품 출시, 자재 변경, 단종 등 기업 활동에 따라 계속해서 생성되고 변경되고 소멸한다.
초기에 제대로 된 데이터 거버넌스(Data Governance), 즉 품목을 생성하고 관리하는 '규칙과 책임자'를 정해두지 않으면, ERP 시스템은 3개월도 안 되어 다시 온갖 중복과 오류 데이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과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핵심은 '전사적 합의'와 '명확한 원칙'이다.
첫째, 전사적 협의체(TF)를 구성해야 한다. IT팀이나 특정 부서에만 맡겨서는 절대 안 된다. 영업, 생산, 구매, 회계 등 관련 부서의 핵심 실무자들이 모두 참여해야 한다.
둘째, 분류 원칙(Principle)을 수립해야 한다. 가장 상위 레벨의 분류 기준, 즉 '대분류'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원칙이 정해져야 하위 분류가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명명 규칙(Naming Rule)을 정의해야 한다. '같은 품목, 다른 이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같은 품목을 떠올릴 수 있도록 품목명 생성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넷째, 데이터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체계를 유지하고 관리할 규칙과 책임자를 지정해야 한다. 신규 품목 생성 및 변경, 단종에 대한 명확한 프로세스를 수립하고 책임자를 두어야 한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분류해야 하나요? 그냥 부서 편한 대로 하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안 된다.
품목 분류체계가 반드시 지켜야 할 최상위 원칙은 바로 '회계 기준과의 정합성'이다. ERP는 단순히 재고 수량을 파악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기업의 모든 자원 흐름을 '돈'으로 기록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만약 품목 분류가 회계 계정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ERP는 반쪽짜리 시스템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를 들어, 바이오 의약품 기업의 품목 분류는 다음과 같은 회계적 의미를 가진다.
생산 과정에서 '원자재'가 투입되면 회계적으로 재고자산(원재료) 계정에서 차감되어 재고자산(재공품)으로 대체된다. 이것이 반제품이 되고, 최종적으로 완제품이 완성되면 '재고자산(제품)'으로 쌓인다. 그리고 이 제품이 고객에게 판매되는 순간, 매출원가(Cost of Goods Sold)라는 비용으로 전환되어 손익계산서에 기록된다.
만약 실무자가 편의대로 원자재로 등록해야 할 품목을 일반 소모품으로 등록하거나, 반제품 코드를 임의로 생성해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ERP는 원가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고, 재고자산 가치를 왜곡하며, 결국 엉터리 재무제표를 만들게 된다. 마음대로 만든 분류체계는 결국 ERP를 쓸 수 없게 만드는 지름길인 셈이다.
ERP 도입 시 품목등록과 분류체계 수립은 단순히 데이터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이것은 기업의 모든 물적 흐름을 재무적 언어로 번역하기 위한 '규칙'을 세우는 전략적인 과정이다.
나 역시 이직한 회사에서 엉망으로 도입된 ERP 시스템을 2년간 사용되어 그 고통을 직접 피부로 겪은 경험이 있다. 분류체계는 부서 편의적으로 뒤섞여 있었고, 당연히 회계 데이터는 맞지 않았다. 결국 기존 체계를 모두 뒤엎고, 품목 분류를 회계 기준에 맞춰 바로잡는 대수술을 진행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가 더 나았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잘못 끼운 첫 단추는 단순히 푸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옷 전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고, 수많은 논쟁을 거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회계와 단단히 연결된 이 데이터의 척추를 바로 세우는 일에 투자하는 노력과 시간은, 향후 ERP 시스템을 통해 얻게 될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효율성으로 반드시 보상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