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ERP는 모두 SAP의 아들, 딸이다.

손자, 손녀 일수도

by 구매가 체질

ERP를 깊이 있게 경험해 본 실무자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말이 있다.


더존이든, 영림원이든, 이카운트든 결국은 다 SAP의 자식들이야.


처음 들으면 국산 ERP의 자존심을 무시하는 오만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비난이 아니라, 현대 ERP 시스템의 근본적인 구조와 철학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에 가깝다.


왜 국산 ERP 대표 주자들이 거인 SAP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이는 단순히 기능을 베꼈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SAP가 현대 경영 정보 시스템의 '문법' 그 자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 거인 SAP가 쌓아 올린 'ERP의 문법'


1972년, IBM 출신 엔지니어들이 설립한 SAP는 단순히 회계나 재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업의 모든 활동, 즉 영업 -> 생산 -> 구매 -> 재고 -> 회계로 이어지는 모든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하나의 시스템에서 실시간으로 통합하겠다는 혁신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SAP는 전 세계 유수 기업들의 가장 효율적인 업무 방식, 이른바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자사의 시스템에 녹여냈다. 이로 인해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모듈(Module) 개념이다.


FI (재무회계): 기업의 재무제표를 만들기 위한 모든 거래 기록

CO (관리회계): 원가 계산, 수익성 분석 등 내부 의사결정을 위한 회계

SD (영업관리): 견적, 주문, 출하, 청구 등 영업의 전 과정

MM (자재관리): 원자재 구매, 입고, 재고 관리 (내친구)

PP (생산관리): 생산 계획, 작업 지시, 공정 관리


이 모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기업 활동 전체를 통합 관리하는 것. 이것이 바로 SAP가 정립한 ERP의 '표준 문법'이다.


이후에 등장한 거의 모든 ERP는 이 모듈 구조와 프로세스 통합이라는 기본 철학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모든 현대 자동차가 엔진-변속기-바퀴라는 기본 구조를 따르는 것과 같다.


2. 한국의 '자식들'은 어떻게 성장했나?


그렇다면 더존, 영림원, 이카운트는 SAP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SAP라는 거대한 '아버지'가 만든 기본 골격 위에, 한국 기업 환경이라는 토양에 맞춰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펼치며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첫째, 철저한 '현지화(Localization)'에 성공했다.


SAP와 같은 글로벌 ERP는 한국의 복잡한 세법, 전자세금계산서 의무 발행, 독특한 결재 문화, 상거래 관행 등을 100% 반영하기 위해 비싼 비용과 긴 커스터마이징 기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국산 ERP들은 태생부터 한국의 실정에 맞춰 개발되었다. 부가세 신고, 원천세 관리, 연말정산 등은 '그냥' 된다. 이는 한국의 중소·중견기업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둘째, 비용이라는 현실의 벽을 허물었다.


과거 ERP는 '대기업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라이선스 비용과 컨설팅 비용, 그리고 기나긴 구축 기간은 중소기업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았다.


하지만 국산 ERP들은 이 벽을 허물고 'ERP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훨씬 합리적인 가격으로 빠르게 도입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이카운트와 같은 클라우드 ERP가 등장하면서, 이제는 매달 사용료를 내는 구독 방식으로 막대한 초기 투자 없이도 시스템을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언어는 달라도 문법은 같다


난 여러 회사를 거치며 SAP와 오라클 같은 글로벌 ERP는 물론, 더존, 영림원, 이카운트 등 국내 대표 ERP들을 모두 사용해 볼 기회가 있었다. 화면의 색깔과 메뉴의 위치는 제각각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근간을 이루는 '큰 축'은 거의 같다는 것을 매번 실감했다.


영업 주문이 생산과 출고로 이어지고, 그 모든 과정이 회계 전표에 자동으로 기록되는 핵심 로직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일했다. 덕분에 새로운 ERP 시스템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막막함은 적었다. 이미 핵심 문법을 알고 있으니, 약간의 방언과 억양에만 익숙해지면 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통해 "국산 ERP는 SAP의 자식들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SAP가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표준어'를 구사한다면, 국산 ERP들은 한국 시장에 최적화된 '능숙한 현지어'를 구사하는 것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위대한 문법을 배웠지만, 자신들이 살아가는 땅의 사람들과 가장 잘 통하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똑똑한 자식들인 셈이다.


결국, 어떤 ERP를 선택하든 우리는 SAP가 정립한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을 이해한다면, 새로운 시스템 앞에서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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