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SCM 전문가는 사라질 직업인가?

나는 안전할까?

by 구매가 체질

최근 AI가 계약서를 검토하고, 공급망을 최적화하며, 심지어 협상까지 한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SCM 분야, 전체 프로세스의 첫 단추를 꿰는 이 일이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까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마치 거대한 블랙박스처럼 느껴지는 AI,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 끝에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습니다.


블랙박스 열어보기: AI를 '공급망'으로 분석하다


공급망 관리자로서 저에게는 세상을 '공급망'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원자재 조달부터 가공, 완제품 생산, 그리고 소비자 전달까지. 이 익숙한 렌즈로 AI를 들여다보자 놀랍도록 비슷한 구조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치명적인 약점들이 존재했습니다.


1단계: 원자재 수급의 함정 (편향된 데이터)


모든 공급망은 원자재에서 시작합니다. AI의 원자재는 바로 '데이터'입니다. 하지만 이 원자재는 처음부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록, 인터넷에 떠도는 텍스트와 이미지 등은 그 자체로 인간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해야 할 원자재가 이미 오염되어 있는 셈입니다.


아마존이 개발했던 채용 AI가 대표적입니다. 과거 10년간 남성 위주로 채용했던 데이터를 학습했더니, AI는 '여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력서에 감점을 줘 결국 폐기되었습니다. 미국 법원의 재범 예측 AI '컴패스(COMPAS)'는 흑인의 재범 확률을 백인보다 2배 높게 예측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섬뜩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우리 회사가 도입할 공급업체 평가 AI가 과거의 편향된 거래 데이터로 학습했다면? 특정 국가나 특정 규모의 잠재적 파트너를 부당하게 걸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데이터 기반'이라는 합리적인 말 뒤에 숨어, 인간의 편견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단계: 제조 공정의 그림자 (보이지 않는 노동)


불량일지도 모르는 원자재는 '제조 공정'을 거칩니다. AI에서는 이를 '데이터 라벨링'이라 부릅니다.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수많은 데이터를 인간이 일일이 정제하고 분류하는 과정이죠. AI 프로젝트 시간의 80%가 여기에 쓰인다고 합니다.


화려한 AI 기술의 이면에는 저임금의 '유령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고된 수작업이 있습니다. 결국 AI의 지능은 기계 스스로 깨우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의 판단과 노동이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의류 공장의 노동 인권을 따지듯(ESG), AI라는 '제품'의 공급망에도 숨겨진 노동과 윤리적 이슈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결국 AI는 편향된 원자재(데이터)인간의 주관이 개입된 제조 공정(라벨링)을 거쳐 만든 완제품인 셈입니다. 공급망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이는 곳곳에 리스크가 도사리는 매우 불안정한 프로세스입니다.


나의 일은 어떻게 될까: 자동화와 재편의 기로에서


이 불안정한 AI가 제 업무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단기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자동화될 업무: 견적 비교, 발주서 생성, 재고 관리, 단순 계약서 검토 등 패턴화된 반복 업무는 AI의 좋은 먹잇감입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동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라지는 중간 사다리: 과거에는 단순 업무부터 시작해 경험을 쌓고 전문가로 성장하는 경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AI가 이 '중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릴 수 있습니다. 신입 사원들이 경험을 쌓을 기회가 줄고, 노동 시장은 소수의 AI 전문가와 다수의 단순 업무 보조 인력으로 양극화될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구매 담당자는 이제 쓸모가 없어지는 걸까요? 저는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인간의 영역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불안을 넘어 전략으로: 미래의 구매 전문가 되기


기술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AI라는 파도에 휩쓸리는 대신, 파도를 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와 같은 구매 담당자들은 AI를 새로운 '공급업체'처럼 다루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1) 'AI 공급망'을 감사하는 전문가

AI가 제시한 데이터를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AI라는 '제품'의 명세서를 요구해야 합니다. "이 AI는 어떤 데이터로 학습했는가?(원자재 분석)", "데이터 정제 과정에 어떤 주관이 개입될 수 있는가?(공정 감사)", "결과값에 잠재적 편향은 없는가?(품질 검수)"라고 질문하고 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AI의 조수가 아니라, AI를 감독하고 최종 책임을 지는 AI 감사관이 되어야 합니다.


(2) 데이터 너머를 읽는 전략적 협상가

AI는 과거 데이터 분석에 능하지만, 공급사와의 신뢰, 복잡한 이해관계, 예측 불가능한 미래 리스크를 읽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숫자에 드러나지 않는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복잡한 딜을 성사시키며, 지속가능성(ESG)과 같은 윤리적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단순 '구매자'를 넘어 공급망 전체를 조망하는 전략가로서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3) 윤리적 AI 도입을 이끄는 설계자

우리 회사에 어떤 AI 솔루션을 도입할지 결정하는 과정에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AI 공급망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알고리즘의 공정성을 검증하는 프로세스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이는 구매 담당자의 새로운 책임이자,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AI 시대에 SCM 업무의 모습은 분명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고, AI를 경쟁자가 아닌,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하도록 돕는 강력하지만 결함 있는 '도구'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 도구의 숨겨진 공급망을 이해하고, 현명하게 감사하며, 윤리적으로 사용할 때, 우리는 AI 시대에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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