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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글쓰기 세번째 글 (삼촌이라니까!!!)

호칭이 주는 무게감

by 청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월의 무게를 속으로 삼키는 일이다. 어린아이가 청년이 되고, 청년이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지만, 그 걸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나도 그 순리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지만, 그 길 위에서 마주하는 불편함과 아쉬움, 그리고 점점 타들어 가는 생의 촛불을 떠올리면 마음이 묘하게 무거워진다.


서울에서의 바쁘고 복잡한 삶을 뒤로하고, 나는 별내라는 작은 신도시로 이사했다. 이곳은 ‘사회적 협동조합 아파트’라는 독특한 형태의 공동체였다. 아파트지만 시골 마을처럼 이웃 간의 정이 오갔고, 커뮤니티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루어졌다. 나도 자전거동아리와 합창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어서 국토종주, 동해안일주, 제주일주등을 동아리회원들과 함께했고 마을행사에서는 합창곡을 부르면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내가 사는 1903호 옆, 1904호에는 유모차를 타고 4년 전 입주한 꼬마 신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시간이 흘러 이제 어린이집에 다닐 만큼 자랐다. 맞벌이하는 부모를 대신해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돌보셨다. 옆집과는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이웃으로 잘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이와 할머니를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준서야!”


그런데 아이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서야,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그 순간, 엘리베이터 안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혹시 내 뒤에 진짜 할아버지가 계신가 싶어 슬쩍 돌아봤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나한테 한 말이었다. 설마, 나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그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감정이 몰려왔다. 마치 대형 트럭이 갑자기 돌진해 온 것 같은 충격, 메가톤급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 나는 아직 중년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 앞에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그 호칭은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혀버렸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어디 봐서 내가 할아버지야?” 주름이 그렇게 많나? 머리가 많이 새었나? 이마를 찡그려 보고, 눈을 부릅떠 보고, 턱을 쓸어내려 보았다. 뭐야, 그냥 평범한 중년 남자인데.


물론, 언젠가 나도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언젠가’를 최대한 늦추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니 노년이 성큼 다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옆집 아저씨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아니, 준서 할머니가 나보고 ‘할아버지’라 하시더라니까? 너무 서운했어.”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심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몇 주 후,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준서를 만났다. 이번엔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준서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환하게 터졌다. “그래! 삼촌이지! 내가 왜 할아버지야!”


‘할아버지’에서 ‘삼촌’으로 바뀌는 찰나, 나는 다시 젊어진 기분이었다. 불과 몇 주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호칭 하나가 주는 무게감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허망해졌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한마디.


“삼촌!”


그래, 난 아직 너에게 삼촌뻘이라고. 그리고 내 청춘은 끝나지 않았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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