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한 추석,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마크 브래드포드전

by 청일

긴 추석 연휴, 딸과 함께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을 찾았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마침 딸도 시간이 되어, 함께 미술관을 걷는 일이 가능해졌다.


전날 내린 비 때문이었을까.

하늘은 유난히 청명했고, 구름은 한가로이 흘렀다.

한산한 거리, 막힘없이 달리는 차창 너머로 한강이 반짝였다.

가을 하늘과 강의 푸르름이 맞닿은 풍경 속에서, 마음도 덩달아 평화로워졌다.


“추상미술 전시회인데, 같이 갈래?”

내 물음에 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추상화 좋아! 같이 가자.”

전시장에 들어서자 영상 작품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딸이 물었다.

“아빠는 설명을 먼저 보고 작품을 봐? 아니면 작품부터 봐?”

나는 보통 설명을 보지않고 먼저 작품을 본다. 그래야 내 심상으로 작품을 볼 수 있다. 먼저 설명을 봐버리면 그 설명의 틀속에서만 작품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해야 나의 감상과 작가의 의도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마음에 새겨둔 듯, 곧장 다른 전시실로 걸음을 옮겼다.

전시장은 넓고 고요했다.

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체험형 작품,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회화들이 이어졌다.

작가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작품 속에는 확실한 언어가 있었다.


그는 1961년생 흑인 작가.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오며 감내해야 했던 삶의 결들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검고 하얀 색면, 불규칙한 질감, 거칠게 덧붙인 종이의 표면 속에 억눌림과 저항, 그리고 존엄의 흔적이 있었다.


“같이 감상하고 나서, 15분 동안 글을 써보자.”

내 제안에 딸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 각자 선택한 작품을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수십 점의 작품 중, 같은 작품을 고른 것이다.

마음이 닿은 곳이 같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아빠의 감상평

미용실을 하던 엄마가 늘 쓰던 퍼머 종이를 겹겹이 덧붙이고, 늘어뜨려 만들어진 격자무늬.

그것은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다가도 어느 순간 혼란의 웅덩이로 빠져든다.

삶의 표면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불안과 상처처럼.

나는 이 작품을 마주하며,

덧붙여진 종이들이 마치 생의 아픔 위에 붙인 반창고처럼 느껴졌다.


어디가 더 깊게 다쳤는지, 어떤 흔적이 더 오래 남았는지

그조차 알 수 없는 상처들 위에 덕지덕지 붙여진 치유의 흔적들.

그 반창고들은 언젠가 아물어갈 생의 자국을,

혹은 아직 치유되지 못한 기억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작가는 흑인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아픔들을 재료로 삼았다.

쓰레기로 버려질 종이들이 다시 모여

존엄을 회복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절절한 외침이자 동시에 치유의 의식이었다.


한 사람의 상처가, 한 사회의 상처가

이 격자 안에 알알이 박혀 있다.

그것은 개인의 고통이면서도,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생의 무늬다.

오늘 나는 이 작품이 뿜어내는 온기와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나를 위한 치유의 시간이, 타인의 고통을 품는 확장된 치유의 공간으로 넓어져 간다.

오래된 이야기의 슬픔이, 오늘의 나에게로 조용히 건너와

“함께 아프고 함께 나아가자”는 속삭임으로 남는다.



딸의 감상평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파마 롤 종이를 이용해 이 심플하지만 심오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종이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반복성과 공백이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이 있다.

나는 그 나열성과 빈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게 시선이 끌렸다.


같은 크기의 종이들이 정렬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이 다르다.

살짝 그을린 종이, 많이 타들어간 종이, 구겨진 종이, 반듯한 종이.

그 모습을 보며 ‘이 종이들이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같은 인간이지만, 생김새와 성격, 그리고 살아온 흔적이 다르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지만,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극이 생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오래 살진 않았지만,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인종차별과 이주의 어려움을 느꼈다.

이 종이들의 배열이 그 시절의 감정들을 떠올리게 했다.

서로의 공간을 유지한 채 질서 있게 이어진 종이들은 이곳의 주인처럼 안정되고 평화로워 보인다.

반면, 엉켜서 불규칙하게 자리한 종이들은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하다.

마치 이곳에 녹아들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나라다.


그들이 ‘미국인’으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까를 이 작품이 상기시킨다.

이건 단지 인종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기 위한 개개인의 노력과 사투,

그럼에도 여전히 녹아들지 못해 어딘가 엉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그 사회 속에 스며들어 안정된 존재가 된 사람들. 안정된 존재임에도 어딘가가 그을려져있는 상처가 있는 사람들.

이 수많은 종이들 중 나는 어떤 종이에 속할까.

아마 아직은 조금 엉켜 있는 종이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이 사회,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

조용히 자리 잡은 하나의 안정된 종이가 되고 싶다.


두 편의 글을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묘했다.

같은 작품을 보았지만, 나는 치유를, 딸은 소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현재를 성찰했고,

딸은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아버지와 딸의 시선이 다르면서도 닮아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오늘 미술관에서 우리가 나눈 것은

단순한 ‘그림 감상’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건너보는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가끔은 이렇게

같은 그림 앞에 서서,

각자의 언어로 느낀 것을 적어보려 한다.


그림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건

미술의 언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창의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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