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례 언니. 천경자
〈길례 언니〉는 천경자 화백의 대표적인 여인 초상화 중 하나로 1970년대 작으로 추정된다.
노란 옷을 입고, 커다란 흰 모자를 쓴 여인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주위를 감싸는 붉은 카라꽃과 하얀 카라꽃, 그리고 날아드는 나비들은
삶의 생명력과 덧없음을 함께 품고 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의 얼굴은 잿빛이다.
생기를 잃은 듯하지만, 그 눈빛은 묘하게 강하다.
고독과 체념, 그리고 무언의 품위를 동시에 담고 있다.
천경자는 화려한 색채 속에서도 늘 슬픔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여인들은 언제나 상처 입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존엄’을 지켜내는 존재로 남는다.
화가는 이 인물을 단순한 모델로 그린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친 ‘한 사람’을 그려낸 듯하다.
살아오며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
그 존재를 향한 그리움이 붓끝에 머물러 있다.
천경자의 붓끝에 머문 여인,
〈길례 언니〉.
길례 언니는
나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굴곡진 인생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있다고
생각한 날에
길례 언니가 생각났다.
그림 속 그녀의 얼굴은
한 생을 견뎌낸 사람의 얼굴이다.
천경자의 삶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여인으로, 예술가로,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버티며
자신의 색을 지켜낸 시간들.
그때 그녀는 아마,
길례 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살면서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세상의 오해와 비난에도
묵묵히 자신을 믿어줄
그 한 사람.
그림 속 언니의 눈빛에는
그리움과 체념,
그리고 사랑이 섞여 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마음.
살아온 분량이 차오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그 마음의 무게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며
내 안의 길례 언니를 찾아본다.
모든 걸 다 털어놓아도 좋은 사람,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사람,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그림은 그렇게 속삭인다.
“삶은 정답이 아니라, 결이야.”
누군가는 눈물로,
누군가는 색으로,
누군가는 침묵으로
그 결을 견디며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단 한 사람을 가진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