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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스빈 Jul 01. 2023

당신은 언제 사표를 던졌나요?

내 생애 두 번째 사표를 던지다.

대학 4학년시절

나의 지상최대의  관심사이자 꿈은 단연코 취직이었다. 내게는 취직을 빨리 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이유가 있었다.


나보다 1살 연상인 지금의 아내와 CC로  함께 캠퍼스를 누빈시간은 고작 1년이었고 아내가 중학교 선생님으로 발령받고 나는 대학 2학년으로 복학을 하였으니 연애기간 동안 난 대부분 돈 못 버는 학생신분이었다.


결혼이 뭔지도 잘 몰랐던 시절 오로지 빨리 결혼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서 나는 졸업과 동시에 반드시 직장인이 되어 있어야  했다. 오로지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서…

그땐 그것이 취직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아내도 나의 취직을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그때 사용한 두꺼운 영어사전 첫 장에는 아내의 응원의 메시지가 담겨있다(지금도 나는 그 사전을 간직하고 있다.) 그 덕분에 졸업하기 전에 다행히 취직을 하고 나도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렇게 원하던 결혼을 지금의 아내와 하게 된 것이다. (기쁜 일이었겠지? 음~~~~ㅋㅋㅋㅋ.)


첫 직장은 광화문 미대사관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설레는 첫 직장생활이었다. 그렇게 직장생활 9개월 만에 나는 그토록 원하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아내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함께 맛있게 먹고, 출근하는 나를 배웅해 주는 아내를 뒤로하고 신나는 첫 번째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나는 직장에서 자금 업무를 맡았고 주로 명동에 위치한 투자금융회사(단자사)를 오가며 회사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다. 첫 직장에서 나는 너무도 좋은 상사분들을 만나서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고 우연한 기회가 찾아와 첫 번째 사표를 내고 전혀 다른 직종의 광고회사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생애첨으로 광고 모델도 해보고 광고료를 받으러 오는 유명 연예인들도 직접 보기도 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은 내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고 직장동료들과 동아리 활동도 하면서 즐거운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직장에서 나는 신입 사원 채용과 관련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서울 9개 대학에 입사원서를 배포하고 지원자들 2차 필기시험 대상자를 선별하고 3차 면접을 진행하고 최종 선발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두 달간의 OJT교육을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들이었다.


당시엔 광고회사 취업 열풍이 불어서 지원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고 그중 10여 명의 신입 사원을 선별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들 대단한 스펙을 보유한 우수한 인재들이어서 그중에 옥석을 고르는 일은 여러 선택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임원진들의 최종선택으로 신입사원 채용이 끝이 나면 2개월간 각 부서를 돌며 실제 진행되는 업무들을 상세히 배워나가는 교육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었다. 2개월간의 신입교육 프로그램이 끝나고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동안 교육이 끝나면 의례히 해왔던 교육 후기를 적는 대신에 나는 1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후기를 갈음했다. 취지는 1년 후 내 모습을 되돌아보고 신입 때 가졌던 맘가짐을 다시 한번 다잡아보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무사히 2개월의 수습 교육기간을 마치고 그동안의 교육 일지와 교육후기를 적은 편지글을 모아 나는 사장에게 최종 보고를 하였다.


서류를 넘겨보던  사장은 갑자기 직원들의 편지가 적혀있는 종이뭉치들을 사무실 허공에 휙 하고 던져버렸다. 사장의 생각은 나와 완전히 달랐던 모양이다.  순간 내 뇌리엔 지금 이 상황이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허공으로 흩어져 날리는 편지들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스포츠 경기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슬로비디오로 보여주는 듯 내게는 시간이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며 바닥에 한 장씩 한 장씩 사뿐히 내려앉았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은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비디오처럼 남아있다. 그러고는 들리는 한마디. 이걸 교육후기라고 받아온 거냐 라는 일갈을 들으며 (그 말 담으로도 여러 말들이 ….) 나는 주섬주섬 흩어진 종이들을 주워 들어야 했다. 아! 내가 이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나는 그 잔상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빨리 이 직장으로부터(정확히는 사장으로부터)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이직을 생각하며 힘들게 맘 고생하고 있을 때 아내와 같이 명동을 나갈 일이 있었다. 함께 어느 식당에서 김치찌개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는 쓴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나는 직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고 빨리 이직하고 싶다는 말을 건네는데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여보! 산입에 거미줄 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맘고생할 거면 그만둬! 다시 직장 잡을 때까지 힘들겠지만 지내면 된다고.

당시 광고 모델 촬영화보

그 말이 나는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난 아내의 그 말을 지금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한다. 고마운 그 말 한마디를!


그 말에 힘입어 난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묵묵히 참으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었던 거 같다. 덕분에 당시 광고업계 서열 10위였던 현직장을 벗어나 5위의 광고업체로 이직을 하며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동료 직원들의 부러움을 사며 나는 당당히 사표를 던지고 룰루랄라 그곳을 떠나 올 수 있었다.


내게는 세 번째 직장의 길이 열렸고 아울러 세 번째 사표를 던질 기회도 동시에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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