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일본 문학가들의 문학관을 보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었다.
그들의 문학관은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었다.
한 공간 안에 작가의 흔적과 문장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곳들을 돌아보며 감탄하던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의 문학관은 왜 없을까.’
게다가 한국의 문학관조차 제대로 가보지 않은 내가
먼 이국의 작가들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오늘 원주에 온 김에
박경리 문학관은 꼭 들르고 싶었다.
이른 시간에 나선 덕분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곳을 향할 수 있었다.
문학관은 의외로
도심 가까운 공원 옆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은 정원엔
나무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었고,
그늘 아래 벤치 하나가 고요히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아쉽게도 문학관은 내부 공사 중이었다.
올해는 관람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잠시 전시 공간만 둘러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학관 옆에는 ‘서희’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가 있었다.
작가의 대표작 속 인물 이름을 딴 공간이었다.
차 한 잔 마시며 쉬어갈 겸 2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작가의 출판물과 영상이 조용히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사색을 위한 방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이었다.
‘서희’라는 이름의 음료를 한 잔 시켜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았다.
바람이 잔잔히 지나가고,
새소리와 음악이 겹쳐 한 편의 시처럼 흘렀다.
박경리.
그녀가 남긴 문학의 울림을 마음에 새기며
내년 재개관 날에는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오후 세 시, 정각.
해설사의 안내로 박경리 작가의 옛집 투어가 시작되었다.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세 남매의 어머니이자 가장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
열 살 큰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붙잡은 담배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고 했다.
집필실은 놀라울 만큼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엔 원고지와 안경, 그리고 오래된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집필실이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고난의 시간을 딛고
문학이라는 산을 묵묵히 올랐던 이들이었다.
그녀가 바라보던 치악산의 능선은
이제 동상 속 그녀의 시선이 되어
여전히 하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삶의 미로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길을 완성한 사람,
그녀야말로 인생의 출구를 찾아낸 위대한 작가가 아닐까.
나무에 새겨진 방명록들 중,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박완서.
“박경리 선생님! 선생님 사시던 옛집에서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며 눈물짓습니다.“
그랬던 박완서 작가도 이제 세상에 없으니
누가 누구를 그립다 말할 수 있을까
그 짧은 글에는 깊은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를 넘어 절친한 벗이었다고 한다.
원주의 텃밭에서 박경리 작가가 직접 가꾼 배추로 김장을 담가 구리에 살던 박완서 작가에게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따스한 일화는 박완서의 산문집에도 담겨 있다.
나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 너머로 이어진 두 작가의 우정이
어디쯤엔가 여전히 빛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박완서 작가의 문학관도 세워지길,
그녀의 문장도 이렇게 한 세대의 풍경으로 남길 바라며
오늘의 평화로운 오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원주의 언덕 위,가을빛에 물든 박경리 문학관을
오랫동안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삶의 무게를 견딘 문장들은 결국,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생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