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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가을의 빛을 담다

가을 출사

by 청일



가을이 깊어가는 길을 달렸다.

세상은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봄의 개나리가 품고 있는 노란빛이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라면,

가을의 노랑은 저물어가는 계절을 알리는 노랑이다.

같은 노랑이라도 계절이 달라지면

그 빛이 품은 깊이 또한 다르다.




한 줄기 거대한 강물이 머리를 맞댄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 두물머리.

두 개의 물이 만나 하나의 강이 되는 곳이다.

이른 아침, 사진반 출사가 있는 날이었다.


오래된 카메라 하나를 어깨에 메고 길을 나섰다.

가을은 이미 한참이나 깊어 있었다.

몇 달 전, 『심미안 수업』 개정판을 읽으며

오래 묻어두었던 카메라를 다시 꺼내 들었다.

갑자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이

불처럼 타올랐기 때문이다.




서른 무렵, 나는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카메라는

장롱 속 깊은 잠에 들어버렸다.

그 오래된 카메라를 다시 꺼내

렌즈를 닦으며 과거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산과 들을 헤매며

야생화를 찍던 그때의 나,

머릿속에 남은 풍경들이 다시 나를 불러 세운다.

그 혈기왕성하던 청년은

이제 흰머리의 중년이 되었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젊은 그 시절의 내가 살아 있다.




뷰파인더 속 가을의 나무들은

쓸쓸하기보다 찬란했다.

며칠이 지나면 잎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겠지만,

그 나무들은 그렇게 겨울을 견딜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으면,

꽁꽁 언 강물을 바라보는

외로운 나무들을 만나겠지.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깊은 동면을 지나 새순을 틔우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안으로 켜켜이 새겨질 나이테처럼,

삶도 그렇게 안으로 다지는 일인 듯하다.




사진의 매력은

직접 그 현장을 두 발로 걸어가야 한다는 데 있다.

카메라를 든다는 건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계절을 가까이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오늘,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또 하나의 나이테를

조용히 마음속에 그려 넣는다.




사진반 회원들과 점심을 함께한 뒤,

나는 홀로 수종사를 향했다.

‘물이 빚어내는 종소리’라는 이름만으로도

청아한 울림이 느껴지는 곳.


산길을 따라 오르는 길,

수많은 차들이 오르내리며 길이 얽혀 있었다.

겨우 주차를 마치고 오르니,

저 멀리 노란 은행잎이 반짝였다.

500년 된 은행나무였다.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두물머리를 지켜온 은행나무는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보이지 않는 바람결에 낙엽이 흩날리고,

풍경의 소리가 가을을 더 깊게 만든다.


두 강은 반가운 만남을 이루고,

이내 함께 흘러간다.

지금은 팔당댐에 막혀 흐름이 멈췄지만,

그 물줄기는 여전히

한강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길이다.




가을의 노랑은 저물어감의 빛이다.

그러나 그 안엔 다시 피어날 봄이 숨어 있다.

오늘의 빛을 담으며 나는 또 한 번,

삶의 강가에서

조용히 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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