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레이터
사울 레이터(Saul Leiter, 1923–2013)는 사진과 회화를 넘나든 미국의 사진작가다.
그는 거리의 결정적 순간이나 극적인 사건보다, 창문, 유리, 눈과 비, 흐릿한 색면 속에 숨어 있는 일상의 정서를 포착했다.
특히 컬러 사진을 회화적으로 다루며, 선명함보다 가려짐·부분·여백을 통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은 주인공이기보다는, 도시라는 시간 안을 잠시 통과하는 존재로 머문다.
눈 덮인 길 위를 한 사람이 걷고 있다.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흰 눈 위에
검은 외투의 인물과 유독 선명한 붉은 우산이 대비를 이룬다.
눈 위에는 이미 여러 겹의 발자국이 나 있고,
인물은 그 흔적들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곧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남겨지는 발자국,
그리고 그 위를 다시 덮어버릴 눈.
이 사진은 ‘어디로 가는가’보다
‘지나간다는 사실’ 자체에 초점을 둔 장면이다.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간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소복이 쌓이는 날도,
햇빛이 쨍하게 쏟아지는 날도
길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나는 그 위를 지난다.
오늘은 눈이 소담 소담 내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몸의 무게만큼 발자국이 생겼다가
연신 내려앉는 눈 속으로
조용히 잠겨 들어간다.
남았다고 믿은 흔적은
머무를 틈도 없이 사라진다.
지나온 시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분명 살아냈고,
분명 견뎌냈는데
뒤돌아보면
허공처럼 비어 있다.
그래서 나는
눈에 지워지는 발자국을
눈이 아니라 마음에 남긴다.
보이지 않게, 그러나 잊히지 않게.
사울 레이터의 사진 속에서도
사람은 늘 뒷모습으로 남아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의 속도로 길을 건너고,
발자국은 화면 안에 남지만
시간은 이미 그것을 지울 준비를 한다.
그는 남기는 대신
사라짐을 끌어안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고 싶어
내놓았던 무수한 말들 역시
눈 소리에 잠겨 흩어진다.
말은 너무 가벼워
차가운 계절을 버티지 못하고
나는 끝내 꺼내지 못한 문장들을
속으로 삼킨다.
내일도
눈길을 걷겠지만
나는 더 적은 말을 남길 것이다.
발자국처럼
잠시 있다 사라질 언어 대신
안으로만 눕혀두는 말 없는 언어들을
차곡차곡 재워둘 것이다.
붉은 우산 하나가
하얀 풍경 속에서 버티고 있듯,
그 침묵은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온기다.
함께 쓰지 못해도,
혼자서라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한
작고 단단한 선택.
수많은 언어들은
그렇게 시간 속에서 절여진다.
차가운 겨울을 지나
비로소 제 맛이 들 때까지.
마늘처럼 맵고,
생강처럼 쓰고,
그러나 끝내는
사람을 살리는 맛으로.
언젠가
단아한 언어로,
말끔한 문장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사라질 것을 알면서
조용히 한 걸음을 남긴다.
눈길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