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
서용선(Seo Yong-Seon, 1953~ )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회화 작가로, 도시·역사·인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업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의 그림은 항상 ‘사람’에서 출발하지만, 그 사람은 개인보다 시대의 얼굴, 도시가 만든 인간의 표정을 담고 있다.
특히 강렬한 원색, 단순화된 형태, 생략된 표정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군중 속 고독, 현대인의 피로와 무감각,
그리고 도시의 기계적 리듬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서용선은 사람의 겉모습을 그리기보다
그 사람에게 서린 시대의 공기, 구조, 폭력성, 피로감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실제 인물이라기보다
‘한국을 살아가는 인간의 집단적 초상’이라고 불린다.
그림의 배경은 ‘서울역 정거장’.
도시는 붉은색, 파랑, 초록의 강렬한 대비 속에서 신호등·표지판·버스 같은 도시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
버스 안의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정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흐릿하고, 인물의 얼굴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익명성은 “도시의 군중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지만 마주하지 않는다”는 현대적 의미를 강조한다.
신호등의 세 개 색깔은 멈춤/기다림/출발이라는 도시의 리듬을 상징하지만, 작품 속 사람들에게는 그 리듬의 움직임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한병철의 텍스트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있으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소통하면서도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오늘의 도시인
그 피로한 일상이 캔버스 위에 압축되어 있다
어느 깊은 갱도에서 막 나온 노동자의 얼굴일까.
아니면 철조망 너머, 초점을 잃은 채 세상을 바라보던 포로의 눈빛일까.
활기차게 오가는 서울역의 풍경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장면이
이 그림 속에 고요하게 정지해 있다.
나는 이런 그림을 오래 바라보기 어렵다.
내 안의 심상이 강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밝고 화려한 것만을 좇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 그림 속 무표정한 얼굴들,
기계처럼 경직된 자세,
도시의 시간을 억지로 견디는 듯한 이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선이 자연스레 멈칫한다.
너무 많은 침묵이 동시에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정작 마음은 어딘가에 멈춰 서 있다.
정보는 넘치고 속도는 더 빨라졌지만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은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림 속 사람들의 굳어진 표정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거울일 것이다.
환한 불빛 아래에 서 있으면서도
내면은 자꾸만 어두운 갱도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
서로 가까이 있지만, 결코 닿지 않는 거리.
움직이지만 살아 움직이지 않는 몸.
그러나 그 무표정 속에서 나는 묘하게
우리의 현실을 끝까지 견디려는 의지를 읽는다.
매일 바쁘게 밀려오는 일상을 넘기며 숨을 고르고,
다시 버스를 기다리고,
다시 지하철 계단을 오른 우리들의 얼굴.
이 그림은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가
어떤 표정으로 이 도시를 건너고 있는지를
단호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잠시 더 이 그림 앞에 머문다.
도시의 침묵을 마주한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