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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스빈 Aug 02. 2023

박완서 선생님이 내게 준 교훈!

선한 영향력

전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방학캠프는 그야말로 방학 때만 할 수 있는 것이었고 학기 중엔 결국 수입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학기 중에 할 수 있는 영어와 관련한 뭔가를 찾아야 했는데 신문을 보던 중 눈에 띄는 전면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영어 말하기 학원모집 프랜차이즈광고였다. 순간 학기 중엔 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방학땐 뉴질랜드로 가서 어학체험을 하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바로 전화 통화를 하고 담당자와의 약속을 정하고 본사로 달려갔다.


본사로부터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와 가맹조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미 난 속으로 학원을 이미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둘러 가맹계약을 하고 32평 발레학원을 인수하여 학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준비 과정에서 두려움도 있었다. 자영업자 10명 중 9명은 망한다고 하는데 내가 과연 학원에 '학'자도 모르는 사람이 잘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꼭 성공할 거라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가장으로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고 실패란 내게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인테리어 관계자를  만나고 학원 도면을 서로 머리 맞대고 이리저리 만들어 가면서 드디어 학원의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이제 이곳에서 내 인생을 건 도박이 시작이 되는 거였다.  15년 직장 생활에서 나오는 월급은 신기한 요술램프이기도 했고 마르지 않는 화수분과도 같았다. 그런 마약 같은 월급을 마다하고 사업으로 월급을 대체한다는 것은 내게 너무도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래도 성공에 대한 믿음은 있었다. 20년 가까이 영어선생님으로 근무 중인 아내가 있었고 영어에 대한 조언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직업은 우리 가정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내에게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학원 오픈을 하고 첫 달 48명의 원생을 모았다. 두 번째 달 80여 명 삼 개월 차에 100명이 넘어서며 학원이 좁아져서 더 큰 장소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이런 성장세는 본사에서도 첨 있는 일이었다. 4개월 차에 근처 학원자리를 물색 중에 괜찮은 자리를 발견하고 오픈 7개월 만에 나는 100평이 넘는 학원을 재오픈하게 되었다. 밀려드는 원생은 대기로 돌려놓고 새로운 학원을 오픈하기 위해 또 인테리어 관계자와  마주 앉아 도면을 그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새로운 학원이 재 탄생이 되고 원생의 숫자는 학원 규모에 맞게 점차점차 늘어갔다. 가맹점 최초로 원생 100명을 기록했고 200명 300명 400명의 신기록을 계속 갈아치우고 있었다. 그렇게 500명의 원생을 기점으로 최고점을 찍으며 나의 학원은  명실상부 가맹점 중 최고의 학원으로 자리매김하며 13년 연속 대상분원이라는 명예를 나에게 안겨 주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나는 갑자기 국세청 세무조사 대상에 선정되며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내는 출근하고 없는 아침시간이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전화를 받았다. 국세청이란다  그리고 학원 앞에 도착해 있으니 와서 문을 열란다.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인가. 대체 뭐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학원으로 가니 국세청 직원 세 명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무조사를 진행예정이니 협조해 달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모든 컴퓨터와 서류들을 몽땅 챙긴다. 어안이 벙벙할 뿐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들이 하는 바쁜 움직임만 지켜보아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모든 서류와 컴퓨터를 모조리 챙겨 나가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 휑하니 가 버렸다. 그 황망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3개월 간에 걸친 피 말리는 세무조사의 시작에 불과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신문기사에 나온 내용을 보며 난 그제 국세청의 세무조사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고수익자영업자 130명에 대한 특별세무조사 진행! 내가 왜 고수익 자영업자에 속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큰 학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무조사는 매우 더디게 그리고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다. 국세청으로 나를 불러서 몇 번의 조사를 받아야 했고 그 와중에 민원으로 누군가가 고발을 했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시기질투한 어떤 사람일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누굴 해한 적도 없이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청옆에 위치한 국세청 조사과(그 당시 노무현 정부시절)에서 조사를 받고 나는 힘든 마음에 무작정 남산엘 올랐다. 남산 성곽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찬란하기 그지없었지만 내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왜 내게 이런 일이 이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세무조사를 받는 3개월의 시간은 내게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그나마 그 힘든 시기에 내게 한줄기 빛처럼 나를 위로해 준 분이 있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었다. 그분의 인생을 알게 되면서 나 스스로를 위로했던 거 같다.


1988년 세상이 서울 올림픽 개최로 떠들썩할 때 남편이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3개월 뒤 아들이 교통사고로 25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연이은 불행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선생님은 절대자에 대한 분노로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고통의 시간에 박완서선생님은 부산의 딸 집으로 내려가셨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는데 뛰어내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님과도 친분이 있던지라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왜 나에게 유독 이런 아픔을 주시느냐며 원망하고 있는데 수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세상 누구든 다 당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유독 당신만 그 불행을 비켜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셨단다. 그 말씀을 듣고 왜 나에게만 이 고통을 주느냐에서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고통을 내가 짊어진 거뿐이라고 위안을 하셨다고 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박완서 선생님의 깨침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세무조사의 긴 터널에서 나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생각하면 내 인생에 있어서 겪지 말았어야 할 힘든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완서 선생님의 아픔이었다.

박완서 선생님의 인생이 나에게 준 교훈이었다.


누나집이 있는 구리 아치울 마을엔 박완서 선생님의 집이 있다. 괜스레 그 동네를 배회하며 녹슨 철문이 있는 박완서 선생님의 집을 바라다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한 번도 뵌 적도 없지만 힘들어하던 시기에 내게 위안을 주셨던 분이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비로운 일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처럼 값진 인생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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