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제한속도 30

by 청일


한때는 아우토반을 달린 적도 있었다.

그곳이 정말 아우토반이었는지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한 시절을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유일한 미덕인 줄 알았던, 엔진 소리가 심장 소리보다 컸던 그런 계절이었다.


세월이 한참을 지난 후 나는 지금 한적한 도로 위를, 창문을 한껏 내리고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달려간다. 아니, 어쩌면 아주아주 천천히, 걷는 속도에 가까운 걸음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가져다준 삶의 깊이도 이제 와 생각하니 나쁜것만은 아니다.

너그러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길 수 있는 마음의 평수가 조금은 넓어졌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일도, 인상을 찌푸리는 일도 많이 줄었다. 세상에 돋아 있는 송곳 같은 말과 행동들에 조금은 무디어졌다는 뜻일 터다. 나는 그것을 세월이 건네준 ‘단단한 긍정’이라 믿는다.

‘오래되었다’는 말은 세월이 켜켜이 쌓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며칠 전, 카메라를 메고 무작정 상계동 판자촌을 찾았다. 그곳은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베어있는 곳이었다. 화려한 서울의 이면과는 대조적인 풍경.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나 싶을 만큼 남루하고 허물어진 공간들이 빼곡했다. 마치 어린 시절, 70년대의 어느 골목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건너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겨울의 찬 기운이 조금은 가신 날, 골목 어귀에 한 할머니가 햇볕을 쬐고 앉아 계셨다. 홀로 앉은 뒷모습이 어쩐지 외롭고도 처연해 보였다. 내가 골목을 오가며 사진을 찍는 동안, 할머니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 기울어가는 태양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계셨다.

한참 뒤,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쓸쓸하기 짝이 없는 노년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허물어져 가는 동네의 풍경은 할머니의 굽은 뒷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누추해진 집들과 느린 발걸음이 겹쳐지자, 마음 한켠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그때,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그려진 흰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차량 제한속도, 30.

어쩌면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차를 몰며, 그동안 달려보지 못했던 가장 느린 속도로 지금 이 구간을 지나가고 계신 것이 아닐까. 덜컹거리는 차가 언제 멈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인생차는 이 동네의 풍경처럼 깊고 오래된 결을 따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나 역시 이제는 속도를 줄이고 있다.

비록 오래된 차이지만, 정성껏 돌보고 닦아준다면 조금 더 오래 달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속 페달을 밟는 대신 브레이크에 발을 살짝 얹고,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을 온몸으로 감상하며 그렇게 가고 싶다.


속도 30.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가장 평온한 삶의 제한속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