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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스빈 Mar 24. 2024

방의걸 작가의 ‘생성의 결’

작품전시회를 보고


낙성대 도시 탐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토요일이른 아침 시간에 집을 나와 지하철로 낙성대역에 도착했다.

어제 한차례 굵은 빗줄기가 지나간 뒤로 서울의 하늘은 봄맞이 대청소를 막 끝낸 뽀드득 거리는 유리창처럼 온 세상이 밝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강감찬 장군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으며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김민주 작가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강감찬 장군의 유적지를 따사로운 봄햇살과 함께 누볐다. 탐방이 끝난 나의 행선지는 예술의 전당이었다.


두어달전 한차례 일정으로 미셸 들라크루아전을 관람하기로 했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패스한 미셸전 관람을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마침 낙성대역에서 남부터미널은 지하철 몇 구간밖에 안되어 오늘은 나온 김에 꼭 미셸전을 볼 참이었다. 남부터미널에 내려 미셸전이 열리는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길엔 마치 단체관람객의 행렬인양 사람들의 물결로 골목이 가득 차 올랐다.


이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즐기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너무도 문화와 먼 거리에서 살아왔던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래도 지금에라도 이렇게 모르는 미술이지만 관람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체만으로도 내겐 대단한 문화적 발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술의 전당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따사로운 봄날을 즐기기 위한 인파도 섞여 있는 듯했다.


미셸전이 열리는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긴 행렬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표소에 가서 티켓팅을 하려니 지금 티켓팅을 하면 4시간 후인 5시에나 입장이 가능하단다 너무도 오랜 기다림이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예박물관에서 방의걸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는 걸 알았던지라 나는 다시 발걸음을 서예박물관으로 향했다.

2층 계단을 올라 전시실로 들어서는 첫걸음부터 예사롭지 않은 대가의 기품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했다.

처음 맞이한 ‘방의걸 생성의 결’

생성이라 함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결이란 생성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작품전의 성격을 정의하는 이 말로 앞으로 펼쳐질 작가의 작품이 부푼 기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작가가 16년 전 남원을 지나가다 안개가 걷히는 산의 풍경을 보고 그려냈다는 이 작품은 수묵으로 그려 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개 낀 산세의 풍경을 너무도 몽환적으로 잘 그려내었다. 마치 사진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가까이 보면 분명 먹만을 이용해 그린 그림이 맞다. 안개가 걷히는 경이로운 산의 모습을 화선지에 묵과 붓으로만 그려냈다는 게 산세만큼이나 경이롭게 다가왔다.

처음과 끝이 모두 물결로만 이루어져 있는 이 그림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듯했고 지난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구본창의 작품 오션을 보는듯했다.

저 찰랑이는 바다의 잔잔한 윤슬들은 마치 한밤의 은하수 잔별들이 대낮의 바다에 내려앉아 있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검은 묵의 터치 사이로 하얀 여백이 만들어내는 미칠 듯 생생한 파도의 윤슬은 내게 찬란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바라본 파도의 잔물결은 오로지 검은 먹의 잔잔한 율동이었으며 멀리 서는 거대한 대양이 살아있는 듯한 생명의 외침 같았다. 영원히 저곳에서 저렇게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빛날 물결이었다.

  저먼 바다 위로 보이는 작은 섬은 무수한 포말로 부서진 하얀 머리띠를 두르며 힘차게 솟아 있는 듯했다.

가까운 파도의 큰 물결이 점점 멀어지며 잔잔한 파도와 어우러져 먼 수평선 아래에 단정히 자리 잡은 작은 섬은 파도의 일렁거림을 구경하느라 심심하지 않을 듯해 보였다.

전시된 모든 작품에는 의아하게도 작품명이 하나도 안내되어 있지 않았다. 이 또한 작가가 의도한 관람객에 부여된 상상의 여백이 아니었을까?

작가의 설명으로는 숨바꼭질이라고 했다. 마치 안갯속에 가려져 숨어 있다가 술래가 사라지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는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생각해 내곤 안개에 가리어진 산의 모습을 마치 작가와 숨바꼭질하는 산으로 의인화해서 표현한듯했다.


오랜 교단생활에서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는 방법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침묵이었다며 여백이 주는 침묵은 그만큼 힘이 있으며 작가가 의도한 여백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했다.

숨바꼭질에선 안개가 여백이고 침묵이고 이야기인 셈이다.

여백이 주는 힘은 없어도 있어 보이고 있어도 없어 보이는 것이 한국화의 특징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가 의도대로 나도 여백의 강한 침묵을 느껴본다.

 

그림 작가이지만 시인임에 틀림없다.

예술은 통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작가의 한마디이다. 온 사방에는 봄을 알리는 준비가 한창이다. 목련 봉오리는 한껏 부풀어올라 언제 터질지 모르게 절정을 향해있고 개나리도 노란 봉오리를 수줍게 내밀고 있다.

지금이야 말고 봄이자 여명의 때인 것이다.

희망이며 기다림이라는 말이 이봄에 한껏 마음에 와닿는다.

전시실 모퉁이를 돌아 접어드는데 소나무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나무의 섬세한 모습들과 소나무 군락이 이루는 서정적 분위기가 마치 실물을 보는 듯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찌 까만 먹 하나로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을 해 낼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까이서 멀리서 보고 또 보고 있으니 마치 깊은 숲 속에서 피톤치드 가득한 사방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지친 폐의 상쾌한 콧노래를 듣는 듯했다.

작가의 고향 고창에는 어릴 적 자맥질하던 저수지가 저 둑 너머에 있었고 저 길은 작가가 수도 없이 다녔던 길이 라고 했다. 오늘 저렇게 그림 한 점으로 남겨진 둑 너머의 저수지는 오랜 추억으로 남아있을 터였다. 안개 낀 듯 여백으로 남겨진 저곳에 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지는 건 작가의 의도대로 나만의 이야기가 또 숨어있을 것이다. 내게도 어린 시절 저수지 물놀이가 기억나는 건 저 여백이 내게 남겨준 추억의 선물인 것 같다.

비가 후드득 내리는 여름날의 풍경이다

오늘 나는  처음 작품을 보며 처음으로 작가를 만나고 처음으로 작가의 육성으로 작품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기막힌 행운을 잡았다. 작품을 반쯤 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행렬이 일제히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귀는 그림이 아닌 백발의 작가에게 꽂혀있었다. 나도 발걸음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바로 방의걸 작가였다.

작품 한점 한 점을 설명할 때마다 그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고 그의 눈은 윤영처럼 빛나고 있었고 주름진 얼굴이지만 분명 철부지 소년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어릴 적 두두둑 비가 내리면 그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에 빠지던 소년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 빗소리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빗소리를 그린다는 말이 저 그림을 보면서 가능하다는 걸 느꼈다.

보이지 않는 빗소리를 보이게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바로 생성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듯했다.


저렇게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나면 또 밝고 청명한 하늘이 열리며 빗물 머금은 잎새들은 또 태양의 빛을 받아 진주처럼 반짝일 것이다. 자연이 주는 생명의 순환을 저 비 내리는 그림 한 점이 느끼게해준다.


작가의 그림은 함축,절제,단순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구구절절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장편소설이 아니라 담백한 몇 줄의 시와 같다.

그래서 더 함축적이며 절제된 맛이 있는듯하다.

작가는 말한다

거짓말 없이 표현하라고

느끼지 않은 것은 그리지 말라고

그래서 작가의 작품엔 작가의 시선과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들여다 보인다.

작가의 작품을 보다 보면 실수로 떨어 진 점이라 생각되는 푸른 점들이 보이는 곳이 간혹 있는데 작가는 이것을 운치점,태점이라고 말했다. 그만이 감추어둔 비밀스러운 점들이다.

우연히 노작가를 직접 대면할 수 있어 정성스런 사인까지 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작가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온 삶속에서 경험하고 보았던 수많은 풍경들이 머리속이 아닌 가슴속에 칩으로 박혀 있고 그것을 하나씩 꺼내서 작품으로 만든다고 했다. 머리가 아닌 가슴속에 저장된 장면이기에 이리도 생생히 울림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의걸 작가를 만나고 그의 설명을 듣고 그의 작품을 보고 또 보았다.

한마디로 그것은 한 편의 시였고

노작가의 추억이었으며

남겨진 여백들은

내게 장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소리를 눈으로 보게하는 신기한 경험이기도했다.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 종착지에 다다른 여유와 인생을 조망하는 너그러우면서도 소년 같은 순수를 보았다.

나도 방의걸 작가처럼 소년의 마음으로 세월에 물들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하여 나는 오늘

여백으로 빛나는 윤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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