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ㄴ’이 들어가면 시간의 속도가 빨라진다고들 한다. 이 명제의 과학적 근거는 체감 아닐까.
새해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월의 끝자락이다. 불현듯 ‘월급날이네’ 생각하다가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나는 뭘 했지 싶어 씁쓸해졌다. 옆에 앉은 동료에게 ‘나 뭐했지?’라고 한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열심히 일했지.”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렇구나. 일만 하다가 시간이 흘렀구나. ‘정말 일만 하다 보낸 거면 별론데’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정말 똑같이 아무 일도 없는 무미건조한 날이었을까 싶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그림일기다. 어릴 적 내가 열심히 스케치북에 그날을 기록했던 것처럼. 태블릿 PC에 간단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늘 나의 하루 특별한 사건이 있었거나,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오늘 하루 나의 기분과 감정이 어땠는지를 간단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날은 그림을 그렸고, 그림실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 붙여 넣었다. 물론 퇴근 후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내려올 때면 일기를 거르는 날도 있지만 어플을 켰을 때 비어진 일기를 보면 채우고 싶어 져 그날의 일들을 복기해서 채워 넣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썼다. 한 달이 지나 꽉 채워진 일상들을 보니 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간단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 기록들이 지나온 일상을 마주하게 해 주었다. 머리로는 ‘뭐했지’ 싶었던 날들이 ‘뭘 했네.’ 싶은 꽉 채워진 일상이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도 기록해보니 특별해진 순간이었다.
나이에 ‘ㄴ’이 붙기 시작하면서 시간만 빠르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이에 ‘ㄴ’이 붙기 시작한다는 것은 점점 자신의 감정도 본인이 추스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점점 힘들 때 힘들다 말하는 것이 주위를 피곤하게 만든다고 느끼게 되면서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속이다 보니 남들에게 나 자신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오히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건조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일기를 쓰는 동안만은 내 감정에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오늘은 뭐가 힘들었는지, 내 감정은 어땠는지.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날것의 감정을 써 내려갔다. 일기를 쓴다기보다는 응어리를 뱉어내는 행위가 더 맞았다. 1월 한 달 동안의 일기를 돌아보니 하루하루 뭐 그리 화나는 일이 많았는지 속상함과 짜증이 배어 있었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그렇게 응어리를 마구 쏟아내듯 적고 나면 그 끝은 항상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반성하다 보면 하루의 마무리는 내 감정에 대한 공감과 치유를 통해 내일의 삶을 나아가게 해 주었다.
나이에 ‘ㄴ’이 붙으며 쓰기 시작한 그림일기는 일상에 치여 별일 아니라고 하찮게 치부했던 소중한 기억을 지나치지 않고 마주하게 해 주었고, ‘어른이니까’하며 애써 감추던 나 감정에 솔직해지며 오히려 내 자신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서른 즈음에 나날들을 기록한다는 것은 내 생을 소멸되는 생애로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 비롯된 행위인 셈이다. 시간을 좀 더 소중히 붙잡아 두고 싶어서, 시간의 속도만큼 빠르게 소멸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