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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Feb 18. 2022

서른의 나이 듦, 예순의 나이 듦

 최근 ‘불혹이 되니 왠지 우울감이 들더라’ 말하는 연예인의 인터뷰를 보다가 문득 궁금해진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도 마흔 일 때 저랬어?”

 그냥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빠의 나이 듦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서  나이대에 아빠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아빠는 아빠였고, 항상 어른이었으니까. 나의 물음에 아빠가 “ 40, 60   그렇더라. 70  때도 그럴 거 같은데?”라고 답했다. 나는 “?”라고 물었다. 아빠는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를 불혹이라고들 하는데, 이제 더 이상 젊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고 했다. 아빠가 지나간 청춘을 바라볼 , 초등학생이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아빠가 부러워 그의 나이를 동경하고 선망했지만, 어쩌면 그때의 아빠는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어릴 적 시골 동네를 뛰어다니던 나의 나이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빠는 나에게 종종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때의 이야기, 시골에서 열매를 따 먹던 자신의 어린 날의 이야기를 종종 해주었다.

 

 아빠가 예순의 나이를 지낼  나는 서른이 되었다.  나이만큼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아빠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신을 마주하는  낯설어하셨다. 항상 ‘회사 다녀올게’라고 말하며 집을 나서던 아빠를 마중하다가, 이제는 ‘회사 다녀오겠습니다인사하는 딸을 아빠가 마중했다. 그날 그 광경은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낯선 광경이었다. 매일 다니던 회사를 이제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을 , 아빠는 하루하루 깊어진 수심만큼이나 수척해졌었다. 아빠는 종종 회사 다닐 때 뭐라도 했어야 했는 데하며 회한에 잠기곤 했다. 그러고는 뉴스에 청장년 실업문제가 보도될 때마다 아빠는 ‘사회가 늙은이 취급한다 혼잣말을 하셨다.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온 아빠가 내게 말했다.

 “오늘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에 앉았어.”

 “왜? 만석이었어?”

 “아니, 노인이라서 노약자석에 앉았지.”

 “아니 아빠가 무슨 노인이야.”

 “사회에서 노인 취급하는데 노인이지 뭘.”

 시니컬하게 답하는 아빠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었다. 싱숭생숭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더라. 노약자석에 앉으니까.”


 아빠는 그해 재취업을 했다. ‘30년을 일했는데, 좀 더 쉬었다가 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내게 아빠는 그래도 일을 해야 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생업 문제도 아닌데 뭐 그리 급하게 재취업을 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의 대답을 들은 나는 아빠가 그때 왜 그랬을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한다. 노약자석에 앉았던 그날의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했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아마도 아빠는 낯설었던 나이 듦에서 방황하다 그 표상인 단절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내가 나이 드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삶의 장면에는 항상 젊을 줄만 알았던 아빠의 나이 듦을 깨닫는 순간이 포함되어있었다. 그저 아빠의 나이 듦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내 시절의 변화에서 기인되는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생각던 무심함 때문이었으리라.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두렵다. 세월은 모두가 나이를 먹고 나이가 드는 경험을 하지만, 그 나이대를 살아가는 것은 결국 개인의 실존적 문제이다. 아빠가 상대적 늙음의 나이 육십 대를 살아가는 동안 나는 상대적 늙음의 삼십 대를 살아갈 것이고, 아빠가 또다시 낯설어할 절대적 늙음의 나이 칠십 대를 맞이할 때, 나는 아빠가 낯설어했던 절대적 늙음의 나이 40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저 나이 드는 과정에서 바라는 것은 상실과 완숙의 상대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낯섦보다는 익숙해지길.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능숙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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