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좋아하는 가수가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아이유요.’라고 답할 것이다. 만인이 좋아하는 가수이기에 놀랍지 않은 답변이지만,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의 경우는 그녀의 노래가 외면했던 나를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의 과거와 현재에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 희망이 아니라 서정적인 가사와 멜로디처럼 잔잔히 적당히 흔들리며 다시 일어날 힘을 주기 때문에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좋아한다.
만약 평생을 살면서 꼭 한곡의 노래만 들어야 한다면,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음악이기에 그런 상황이 온다는 것이 굉장히 끔찍하지만) 그래야 한다면,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Love poem’과 ‘아이와 나의 바다’를 고민하다가 ‘아이와 나의 바다’를 고를텐데, 이 음악이 주는 위로가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아이와 나의 바다’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라는 가사 때문에 꽤 많이 울었다. 그러니까 나는 자라오면서 많은 행복을 다음의 나에게 많이 유보해왔는데, 어릴 때는 지금 내 나이쯤 되면 이상적인 어른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상적인 어른의 삶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정의할 수 없어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 확신한다.
유보한 일 중 내 업보가 된 것이 바로 ‘밥벌이’이다.
문과라서 죄송하던 취준생인 나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중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잘 못 채운 첫 단추는 다음 단추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노랫 속 가삿말처럼 쌓이는 하루만큼 더 멀어져 갔다. 겨우 이런 내가 되려고 그때 그렇게 아팠을까. 가끔은 ‘만약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상상한다. 그때는 그게 악수(惡手) 임을 알면서도 묘수(妙手)가 되어주길 바라며 선택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선택의 결과는 온전히 내 몫이었기에 가끔은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져도 나아질 것이라 믿으며 다시금 나를 정비하고 가꾸어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전히 나는 ‘겨우 내가 되려고 그렇게 아팠던 걸까’라는 가사에 눈물이 나지만, 불현듯 어느 순간 돌아봤을 때, 내가 버티며 살아온 날들이, 내가 충실히 살아간 하루가 눈부신 선물처럼 느껴질 날들을 고대한다. 그때까지 휩쓸려 길을 잃어도 그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녀가 그녀의 앨범 트랙에 ‘아이와 나의 바다’에 이어 ‘어푸’를 연결한 것처럼 나는 더 높은 파도에 올라타 헤일과 함께 사라질 타이밍을 스스로 골라야지. 지겹게 만날 이 과정 속에서 나의 행운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