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젊은 날, 서른 즈음에
타종 행사가 있는 해의 마지막 날이면 나는 카운트다운에 맞추어 다가오는 한 해의 행운을 빌곤 한다. 나의 소원은 항상 ‘하는 일 잘되게 해 주세요’ , ‘좋은 소식 듣게 해 주세요’ 등의 성취를 갈망하는 것들이었는데, 적어도 새해 첫 부탁이니 성의를 봐서라도 들어주시겠지 하며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빌었다.
물론 이런 요행은 내가 기대했던 성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매년 12월 31일이면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회고하다가, TV에서 ‘3,2,1’ 하는 순간 눈을 감고 올해는 잘 되게 해 주세요 비는 것이 매해 내가 하던 새해 루틴이었다.
관성적으로 올해도 이 루틴을 따랐어야 했지만, 다가오는 새해를 마주하며 나는 아무런 소원도 빌지 않았다. 그렇다고 올해 내가 희망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행운을 빌어야 하는 해이지만,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한껏 부풀었다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 실망하여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기 싫었을 뿐이다. 그저 지나가는 시간 중 하나라고 여기며 새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내 모습에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하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또 다른 서른 즈음의 나이를 맞이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새해를 맞이했지만,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주변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눈에 보여서였다.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또 누군가는 원하던 부서, 직장으로 이동했다. 남들이 저 멀리 앞서가는데 나만 덩그러니 멈춘 채 목적지 없는 길 위에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삶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도대체 내 시간은 언제 오는지 조급한 마음에 인생 시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문뜩 ‘나는 지금 뭘 하며 사는 걸까’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내 부끄러워져 ‘안구건조증이 좀 가셨네’하며 시답잖은 농담으로 평정심을 되찾는다.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메여있지 않는 모습이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하며 나를 다독인다.
시린 겨울, 그러니까 내가 아직 꽃피울 시기가 오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만개하기를 갈망하는 것은 그저 내가 꽃피는 3월에 태어난 아이라 가지게 된 자연스러운 본능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 모양이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이렇구나’라고 나의 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기로 했다. 서둘러 만개해야 하는 ‘결과’보다는 만개로 향하는 ‘과정’을 즐기기로 했다. 이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언젠가는 만개하겠지. 혹여나 만개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했던 노력들이 향기로는 남아 있을 테니, 내가 꽃피우기 위해 노력했던 날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연습 또한 해볼 참이다. 그 과정에서 남들은 어떻게 꽃 피우는지도 좀 보고, 나도 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을 잘 살피며 살아보기로 했다. 올해는 소원 대신 이렇게 소망을 품었다. 언젠가 피어날 나의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