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햇살 사이로 흐트러진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또 고양이들 소행이구나.’ 한숨 쉬며 쓰러진 새싹들을 세웠다. 그런데 담장 근처 꽃무늬가 그려진 검정 고무신 한 짝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제야 옆집 개인 해피가 다녀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걱정하시는 아주머니께 신발을 건네며 텃밭은 괜찮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며칠 뒤 그 신발이 수국 옆에서 또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해피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쪽 과수원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해피는 작지 않은 몸으로 돌담을 훌쩍 넘어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고추와 토마토 모종이 다치지 않은 것에 안심했지만 신발을 어떻게 드리나 다시 한번 걱정되었다. 며칠 뒤 해피는 결국 마당에 긴 줄로 묶였다.
멀리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해피의 모습이 측은했다. 드나드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는데 우리 집 텃밭 때문에 그리됐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우리 집은 대문이 없어서 길고양이만 아니라 개울 건너 윗집 개인 점박이 녀석까지 가끔 드나들고 있던 터였다. 두더지, 고라니 등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가 있긴 해도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들어서는데 옆집에서 돌담 위로 철 울타리를 설치하고 있었다. 마침, 아주머니께서 다가와 ‘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더 이상 안 되겠다’ 시며 말을 건넸다. 언젠가 택배 기사가 대문이 잠겨 있다며 우리 집을 통해 들어와 택배를 전달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낯선 사람의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CCTV에 잡혀 작은 소동도 있었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담장을 설치하게 되었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10년 이상 없었던 높은 울타리가 설치되니 낯설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음마저 멀어질 것 같았다. 옆집의 꽃씨들이 날아와 우리 집에 꽃 피우기도 하고 자작나무 씨앗이 옆집으로 가서 지금 나무로도 자라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는 음식을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 얼굴 마주 보며 자주 이야기도 했었는데 씁쓸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해피는 울타리가 생긴 후에 행복할까.
울타리라는 단어가 참 이중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전하고 보호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의미와 무언가를 제한하고 고립시키는 부정적 의미 말이다. 물론 우리의 선택에는 어느 쪽에나 장단점이 있을 것이고 양면성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선진국인 독일에 Soziale Zaun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해석하면 사회적 울타리라는 뜻이다. 노숙자들이 많아 일반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설치한 울타리였는데 자선과 인류애를 위한 울타리로 바뀐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경계를 위한 울타리였지만 시민들이 노숙자를 위한 옷이나 음식을 걸어두면서 이 운동은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생각의 전환으로 시민과 노숙자 사이를 구분하고 단절하던 울타리가 공감하고 함께 나누는 따뜻한 울타리가 된 것이다.
인간관계에서의 울타리는 어떨까. 세상에 대한 정보가 많아지고 사람들의 역할이 다양해지면서 인간관계 역시 복잡해졌다. 이런저런 만남에서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 것도 힘들고 그렇다고 상대방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나만 좋으면 됐지 식의 에고이스트도 있고 에코이스트나 나르시시스트란 심리학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용어도 많다. 세상이 삭막해지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각자의 견고한 울타리는 지키면서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좋든 싫든 많은 것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월든 호수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2년 2개월 동안 자연과 살았던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이 진심으로 부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