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놓으니 작품이지, 황칠을 해 놨네? 황칠을...’
미술관 봉사활동 할 때 한 관람객이 남긴 명언이다. 위압적인 건물 내부에 압도될 만도 한데 그 관람객의 솔직한 감상평과 넓은 공간을 울리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현대미술이나 동시대 미술은 악명 높을 정도로 난해하지만 그래도 관람객들이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뭘까?
오래전, 학교 도서관에서 책만 읽던 내가 우연히 시내 화랑을 들릴 기회가 있었다. 이상한 기호의 반복, 아무렇게나 흘려놓은 물감, 부조리를 표현한 듯한 알 수 없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목 역시 불친절하게도 ‘Untitled'나 그림과는 연결할 수 없는 언어들이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막 한가운데서 샘을 찾아야 한다는 묘한 의무감까지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무의식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렇게 현대미술에 빠져있을 때 ‘줄리언 슈나벨’이라는 작가의 순회 전시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깨진 접시 작업으로 유명한 이 작가는 예술에 대한 나의 타성을 완전히 벗어나게 했다. 전시 포스터 하나를 얻어서 얼마나 오랫동안 방안에 붙여두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 최영미 시인의 시집에 등장한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심취해서 한동안 색면추상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했고 잭슨 폴록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 한껏 매료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미(美)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예술의 미적 범주에 추함, 슬픔, 공포와 같은 영역도 포함될 뿐 아니라 기계와 AI까지 등장해서 작품을 결정짓는 기준이 많아지고 불확실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미의 의미가 다양해지면서 현재는 개념미술이 대세인 것 같다. 나에게는 여전히 ‘이게 과연 예술일까?’ 의구심이 드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처럼 충격적이고 불편한 것들도 많다.
지난겨울 개최한 안젤름 키퍼의 전시회에서 ‘폐허가 아름다운 건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기 때문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기억난다. 예술에 끌리는 이유는 개인의 취향처럼 다양할 수 있지만 어쩌면 삶에 대한 그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건 아닐까. 예술을 통해 인간의 자유, 호기심, 그리고 변화를 공유함으로써 삶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그래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으려는 것은 아닐는지.
세상이 매일 변하는 것처럼 미술관도 매번 진화한다. 전시회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채워지고 공간이 변하니 미술관도 살아있는 셈이다. 문득 어린이 단체 관람객이 방문했던 일도 떠올랐다. ‘이렇게 어려운 작품을 감상하러 왔다고?’ 처음에는 의아했다. 학예사의 말에 따르면 옛날과 달리 미술관의 주요 기능 중 교육이 기본적으로 중요해졌다고 한다. 문화의 경험이 쌓일수록 삶의 폭도 넓어질 것이니 어릴 적부터 이러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29시간이나 되는 봉사활동 덕분에 미술관에서 실시한 도슨트 양성 프로그램 기본과정을 이수할 기회를 누렸다. 삶은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면으로 깊어지는 어떤 것이라면 예술을 멀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술관은 항상 열려있고 예술은 언제나 살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