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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Apr 18. 2023

언어의 실수

오래전, 광화문 교보문고 벽면에 걸린 짧은 시 한 편에 온종일 마음이 사로잡혔다. 간결과 직설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된 단 세 문장의 시였다. ‘풀꽃’이라는 시를 처음 봤을 때의 감흥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얼마 뒤 지인이 건넨 그 시집을 받고 얼마나 기뻤던지. 투명하고 쉬운 언어가 이렇게 마음에 와닿을 줄 그때 깨달았다.

문학이 삭막한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데 그 역할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문학 교과서를 채웠던 소설과 수필, 그리고 시는 우리들의 감수성을 마음껏 펼치게 했다. 선율이 붙여진 시들을 친구들과 같이 노래 불렀고 슬픈 시는 함께 외우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은 호수요~’를 패러디하면서 친구들과 깔깔거리던 기억은 지금도 웃음이 난다.

 

대학교 때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처음 접했다.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신청한 강좌는 일단 듣고 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서양철학의 원점이라며 끊임없이 비유를 설명하는 교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해도 없이 내용만 외우고 시험지 앞뒤를 빽빽이 채워 겨우 A 학점을 받았다. 니체 철학은 그때도 인기가 높았다. 인간 정신의 발달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우연히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감상하고 읽기를 시도했다가 두통에 시달렸다. 온통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문장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 이후 ‘신은 죽었다’를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한동안 그의 책만 읽었다. 물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니체 책을 안고 도서관을 나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 있었던 독서토론의 ‘어린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 역시 온통 은유와 상징을 대표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은유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많아 마침 시간을 훌쩍 넘겼다. 어렸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비유들이 나이가 들어 쉽게 이해되었고 나의 보물 1호 책이 되었다.

시에서 은유는 단연 오감도였다. 이상의 얼굴과 겹치면서 무섭다는 느낌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시 해석을 읽고 난 후에야 암울한 시대를 떠올려가며 이해를 했던 것 같다.

 

문학에서 비유 표현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유란 원래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을, 원뜻을 도와줄 수 있는 보조관념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원관념을 보조관념과 은근히 묶어버리는 은유가 직유보다 더 강한 느낌을 준다. ‘별과 같은 당신’보다 ‘당신은 별’이 훨씬 인상적이다. 문학적 은유와 직유 표현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 ‘B 같은 A’와 ‘A=B이다’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하자. 상대에게 ‘바보 같은 너’와 ‘너는 바보’라는 두 표현은 완전히 어감과 뜻이 다르다. ‘너는 바보’가 더 센 수준의 표현이다. 두 남녀의 경우 ‘연인 같은 우리’와 ‘우리는 연인’ 역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상대를 미소 짓게 할 수도 있고 화나게 할 수도 있다. 이미 표현해 버린 언어는 상황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복잡한 세상의 수많은 언어 속에 살고 있다. 순수하지 못한 의도의 언어가 비유와 은유라는 이름으로 남발될 때 세상은 혼탁해지고 모호해진다. 꾸밈없는 언어를 그대로 전할 때 진실은 빛을 발한다. ‘풀꽃’ 시가 따뜻한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자신과 타인을 위해 언어를 진지하게 쓰고 필요하다면 가끔은 침묵하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언어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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