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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May 22. 2023

기억의 편애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길게 구름이 뒤따른다. 시간이 지나면 구름은 퍼지고 옅어지며 모양도 바뀐다. 아련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우리의 기억도 그럴까.


기억력이 좋은 남동생이 있다. 어릴 적 회상은 모두 그 동생에게 의존한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귀가 솔깃해진다. 수십 년 전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그날의 많은 것을 얘기한다. 엄마는 맞장구치며 동생의 기억에 늘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러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입담도 좋아 100분짜리 영화를 자기 생각마저 보태 두 시간 넘게 얘기한 적도 있다. 

지난 설 명절 때 일이다. 온 가족이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불쑥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 추억을 꺼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도 ‘맞아, 맞아’ 하면서 기억의 단편들을 애써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생이 내 기억과는 다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분명 무슨 일 때문에 그날 그 장소에 가지 않았는데 동생은 같이 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서로가 다른 기억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누가 증명해 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 생각을 굽힐 줄 몰랐다. 각자 믿고 있는 바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고집했다. 결국, 기억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화는 미완결로 끝났다. 


이 일은 한동안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나는 분명 그곳에 가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은 동생이 내가 갔다고 하니 혼동이 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과거 나의 잘못된 기억으로 실수한 일을 떠올리며 내 기억에 의심이 들었다. 기억이 나의 정체성이라면 불완전한 기억으로 된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내 기억이 불완전하다면 보통 사람의 기억도 부정확할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기억은 과연 믿을 만한가. 


기억은 4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즉, 일정한 정보를 부호화하고 연관성이 있는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해서 강화하고 저장한다. 그리고 인출 단계를 거치면서 회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기억을 떠올리려면 이 4가지 단계가 모두 잘 작동해야 한다. 우리 뇌의 해마라는 부위가 기억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해마가 손상을 입으면 기억 형성에 문제가 생긴다. 기억을 잘하려면 우선 인지하고 의식적으로 집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정보는 기억해 내지 못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때때로 강렬한 기억도 있다.


살면서 큰 스트레스 중 하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의 기억은 분노나 슬픔과 같은 감정과 연결되어 오래간다. 심지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상처를 준 사람은 어떨까. 자신의 실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알고 있는 경우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그 기억을 스스로 빠르게 치유해 간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 입은 사람 앞에서 오히려 당당해지는 일도 있다. 이처럼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 상처를 입은 사람과 상처를 준 사람의 상황은 정말 달라진다. 각자의 기억을 의미화하면서 변형된 기억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시간은 기억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요인이다. 그래서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 어떤 소설에서처럼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덜어지기도 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기억은 더 힘든 일을 겪으며 희석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연습 없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망각의 힘을 빌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구나 나쁜 기억은 빨리 지우고 좋은 기억은 오래 남기고 싶어 한다. 소중한 추억을 아름답고 의미 있게 남기고 싶은 마음은 기억에 대한 나만의 편애일까. 

허술하고 제멋대로인 기억을 기꺼이 껴안으며 흔들리고 있는 내 삶을 재정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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