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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May 16. 2023

봄날의 까미노 블루(Camino blue)

마지막 지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18일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사랑하는 반려동물 백두를 떠나보내고 절망하고 있을 때, 누군가 제안한 이 길.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백두야 고맙다, 사랑해. 네 덕분에 이 길을 걸었네.

 

2019년을 시작으로 코로나의 세계적 유행 전까지 순례길의 절반을 걸었다. 레온(Leon)부터 시작된 이번 여정. 준비물을 현지에서 사는 어수선한 일정 가운데 첫날부터 부활절 주간 행사인 세마나 산타(Semana Santa)를 직접 보는 행운도 얻었다. 행렬 속 검은 복장의 손이 나를 향해 내밀더니 살포시 잡아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쌀쌀한 이 나라의 날씨를 느끼며 세 번째 순례길 도전이 시작되었다. 고통으로 써 내려간 치유의 글쓰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5년이나 지났기에 이번 여정은 그저 산책하듯 걷고 싶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 발걸음은 무거웠고 7, 8kg의 배낭을 메기도 쉽지 않았다. 또다시 이 길의 기억으로 코끝이 찡해왔다. 그러나 ‘부엔 까미노’ 인사를 시작하면서 금방 익숙해졌고 평지 걷기 26km의 첫날이 무사히 지났다. 그날 밤, 노란색 화살표를 껴안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셋째 날, 아침 출발은 좋았다. 가끔 사진도 찍었다. 파란 하늘과 노란 길의 대비를 느끼며 아름다운 풍경에 여러 번 감탄했다. 점심을 먹고 난 후는 오르막 걷기가 계속되었다. 땡볕을 받으며 네 시간 동안 산길을 걷는 과정에서 고비가 왔다. 과호흡이 시작된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났다. 각자의 걸음으로 힘들게 올라오던 순례자들은 물과 사탕, 그리고 과일 등을 기꺼이 내어주었고 비상시 연락할 전화번호를 건넸다. 한 순례자는 배낭을 알베르게에 미리 맡겨 주기도 했다. 한 시간가량 호흡을 조절하고 천천히 걸으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완주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왜 이 먼 길을 왔지? 이렇게 힘들게 걸을 이유가 있나. 절반이나마 걸었으면 됐지. 이런저런 생각에 피곤한 몸에도 그날 밤은 잠을 뒤척였다.

다음 날, 꿈에 그리던 철 십자가 앞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집에서 가지고 온 돌 하나를 놓고 기도했다. 순례자 한 명이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십자가에 묶는다. 그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오랫동안 기도를 드린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더욱 쓸쓸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오후 내내 내리막길을 걷느라 조심스러웠다. 이미 여러 명의 발목 부상 순례자를 만났으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길 한가운데 주저앉아 버렸다.

갈리시아 지방에 오니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판초를 챙겨 입고 비를 맞으며 출발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말 없는 순례자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간간이 경치를 바라보며 걷기를 하다가 음식점이 나오면 커피와 빵을 먹었다. 비 내리는 날은 진정한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길에서 잃어버리고 다치고 놓쳐버리고, 또한 기쁘고 감동하고 깨달아가는 것이 인생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 눈앞에 나타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은 나를 압도했다.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드디어 해냈구나. 두 시간 정도 머물면서 여러 순례자와 인사를 하고 서로 격려했다. 수십 번의 날들, 수백 번의 Buen Camino 인사, 수천 개의 노란 화살표, 그리고 수만 명의 사람, 수십만 번 이상의 발걸음... 그리고 영원한 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교사 생활이 힘들어서 휴직계를 내고 온 일본인 사또, 홀로 말없이 걷던 70대 스페인 여성 순례자, 그리고 입담이 좋았던 프랑스인 필립, 덴마크인 부부 등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그립다. 순례길의 종지부를 찍은 성당의 향로 미사까지. 매일 산티아고 순례길의 풍경과 추억을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눈물짓기도 한다. 까미노 블루가 시작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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