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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un 08. 2023

새벽 4시에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발신자가 미확인비행물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저하다 이름을 눌렀다. ‘아, 스팸 전화번호였구나.’ 저장한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다 목록을 보게 되었다. 모든 연락처가 532명이나 되다니. 내가 이렇게 많은 번호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맨 위에 도서관 이름이 보였다. 가끔 상호대차 신청을 하는 도서관이었다.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니 가족, 지인, 친구, 제자, 그리고 기관, 관공서 등 다양한 연락처가 나타났다. 얼마 전 새로 저장한 번호도 있었다. 최근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사람들이었다. 몇 년간 연락 없이 지내는 사람들의 이름도 많았다. 지울까. 한편으로는 망설여졌다. 마치 그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윤 작가로 저장된 번호가 눈에 띄었다. 안셀 애덤스의 작품에 매료되어 사진을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을 때였다. 풍경을 주로 담은 그의 사진 덕분에 미국의 광활한 자연에 한동안 푹 빠졌다. 시간만 나면 여기저기 전시회를 찾았다.

공부를 위해 신청한 강좌는 ‘니콘 FM2를 이용한 사진교실’이었다. 수동 카메라 이론과 실습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강사였던 윤 작가는 매시간 집중하고 질문을 많이 하는 나와 점점 친해졌다. 덕분에 사진에 대한 안목이 빠르게 높아져 갔다. 그즈음, 풍경을 찍기 위하여 산으로 바다로 자주 돌아다녔다. 필름의 감도와 초점심도를 조절하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맡기고 인화하는데 지출이 컸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느 날, 강사와 우연히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친한 지인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 불편함이 느껴지면서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다. 시간은 흘러 사진교실은 끝이 났고 사진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졌다. 지난 시간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전화번호가 아직 저장되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또 하나의 전화번호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옛 직장동료였다. 오래전, 같은 사무실에서 생활했던 사람. 남을 먼저 생각하고 항상 미소를 지어서 모두가 좋아했다. 우연히 만나 커피도 함께 나누었는데 부고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불확실한 인생이라지만 일찍 이 세상을 떠나다니 마음이 먹먹했다.

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헤어진 동료의 이름도 있었다. 근무처를 옮기는 그분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겼지만, 끝끝내 답장이 오지 않았다. 잘 지내실까.

 

연락처들을 확인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또 다른 시간과 공간에 내가 있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십 년, 전화번호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고개를 들었다. 삶의 시간을 같이 이어온 사람들과 또한 멀어져 간 사람들이 고스란히 그 속에 있었다. 내 삶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인연들이 바뀌었다. 마치 휴대전화 속 진화의 자연선택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532명의 또 다른 나.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졌다. 사회가 복잡하고 사람 관계가 중요해도 마치 나의 정체성이 532개나 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한 사람이 안정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 150명, 던바의 수(Dunbar's number)가 생각났다. 연락처 중 60% 정도는 1년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전화번호였다. 임시로 저장된 것부터 지웠다. 가벼운 인연으로 저장된 연락처들은 좋은 기억을 마음에 두고 삭제해 나갔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도 여운이 남는 사람들은 남겼다. 터치 몇 번으로 인연들이 사라져 갔지만 내 삶 자체가 정리되는 것 같았다.

 

한결 가벼워진 내 인생.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이치를 배웠다, 새벽 4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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