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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un 15. 2023

아디아포라(adiaphora), 와인이여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인생이 허무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성경에서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결론이 아니다. 전도서 9장을 보면 삶의 덧없음에 파묻히지 말고 현재 이 인생을 즐기라고 얘기한다. 가서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라고 쓰여 있다. 성경에서도 술을 마시라고 하다니 이 얼마나 달콤한 조언인가. 삶을 대하는 전도자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라는 빅토르 위고의 명언을 새기면서 와인을 공부하고자 결심한 나에게 성경 구절은 더할 수 없는 격려가 되었다.

 

와인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미국인 친구로부터 와인 선물을 받은 이후였다. 친구는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밖에 구별할 줄 모르는 나에게 New world wine과 Old world wine을 비교해 가면서 오랜 시간 설명했다. 그저 고개만 간혹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 많구나.’를 새삼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결심했다. 기필코 와인을 정복하리라고.

 

기초 이론부터 시작했다. 떼루아, 빈티지, 리제르바 등 새로운 용어를 배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몇 시간 지나니 친구로부터 받은 와인의 레이블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2019년산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생산, 레드 블렌드 와인으로 묵직한 바디감이 있고 단맛은 없으며 도수는 15.1%. 와인 메이커의 이름도 적혀있었다. 나 자신이 뿌듯했다.

몇 개의 와인병과 각양각색의 코르크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 거실 중앙 탁자 위에 두었다. 포도 품종과 나라별 품종,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이너리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했다. 와인 메이커들의 경험이 담긴 책도 읽었고 와인 역사에 관한 영상은 몇 번을 봐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공부할수록 점점 와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와인이 이렇게 훌륭하고 품격 있는 술일 줄이야.

 

코로나19 세계적 유행이 끝나고 몇몇 나라를 여행했다. 물론 와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말이다. 베트남에서 구매한 와인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도 와인을 생산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포도가 높은 고도에서 재배된다는 말에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뉴욕 여행에서는 와인샵에 들러 눈요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의 매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안목이 넓어진 것 같았다. 문제는 스페인 여행이었다. 하루 순례길 여정의 끝에는 늘 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어찌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게다가 가성비 최고의 세계 3대 와인 생산국인데.

 

‘어, 이게 뭐지?’

‘감마 지피티 41, 간 기능 이상 의심’에 체크가 되어있었다. 건강검진 결과표였다. 다음날 병원으로 바로 달려갔다. 의사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건강은 생각하지 않고 와인에 심취했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당신 눈동자에 건배’라던 험프리 보가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과 와인에 관한 영화 ‘프렌치 키스’도 생각났다. 마치 영화의 필수 아이템인 것처럼 여러 주인공이 로맨틱하게 와인 마시던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 속 멋지게 보이던 와인도 내가 마시면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말 그대로 ‘남이 마시면 로맨스, 내가 마시면 건강 이상’이었다. 현실과 낭만이 이렇게 차이 날 줄 몰랐다.

 

오, 아디아포라(adiaphora), 와인이여. ‘남이 마시면 로맨스, 내가 마셔도 로맨스’가 되는 세상이 꼭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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