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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un 23. 2023

쌀벌레 밥과 어린 왕자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감수성이 풍부한 학창 시절, 별을 무척 사랑했다. 경이로운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어린 왕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천문학은 나의 진로 목표였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천문학과 지망하겠다고 가출까지 했을까. 결국, 원하던 과로 진학하진 못했지만 스스로 찾아간 대학교 천문 동아리는 나의 인생에서 많은 추억을 남겼다.


첫 학기가 끝나자마자 동아리 회원들이 모여 천체 관측 계획을 세웠다. 천문대가 위치한 소백산으로 가자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단체로 맞춘 티셔츠를 입은 후 쌀, 간식 등을 배낭에 넣고 기차역으로 나갔다. 더운 날씨라 남자 선배들은 아예 수건을 목에 하나씩 걸고 나타났다. 망원경을 포함한 짐들로 부담이 많았지만, 마음은 벌써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기차 한 칸을 차지하고 함께 먹으며 노래 불렀던 그 행복한 추억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풍경이었다. 영주에 도착하자마자 희방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지만, 우리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희방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소백산 천문대로 향하는 긴 행군이 시작되었다. 두 대의 망원경을 분해해 나누어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에 올랐다. 힘들었지만 능선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 소백산의 풍광은 놀라웠다. 또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어 우리를 반겼다. 짐을 서로 들어주기도 하면서 마침내 천문대가 위치한 연화봉에 이르렀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저녁 음식 준비였다. 밥 당번인 우리는 식수를 구하기 위해 300m 정도 다시 산에서 내려가야 했다. 가파른 산길이라 걸음마다 조심스러웠을 뿐 아니라 가지고 올라올 수 있는 물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선 코펠에 준비해 온 쌀을 부었다. 그런데 물 위에 쌀벌레가 둥둥 뜨는 게 아닌가. 친구는 비명을 지르더니 멀리 달아나 버렸다. 난감해하고 있는 나에게 선배가 다가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쌀벌레를 하나하나 손으로 건져 내었다. 밥을 짓는 동안 온갖 상념과 함께 끊임없이 ‘일체유심조’를 되뇌었다. 결국, 그날 저녁밥은 입도 대지 않았다.

소백산의 밤하늘은 정말 아름다웠다. 반짝거리는 별들이 살아 움직이며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여름철 대표 별자리는 물론이고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거대한 작품을 만들었다. 자연의 위대함에 그저 넋을 잃었다. 별 헤는 밤은 깊어가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다음날 뜨거운 아침 햇살에 한두 명씩 눈을 떴고 밥 당번인 우리는 또다시 쌀벌레 밥을 해야 했다. 그런데 누가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신기하게도 하루 만에 쌀벌레 밥은 당연시되었고 선배들은 단백질도 충분히 보충해야 한다며 쌀벌레 밥의 당위성까지 강조했다. 나 역시 라면국물에 그 밥을 말아가며 야무지게 먹었다. 며칠 만에 도시의 생활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2박을 더하고 마지막 날, 텐트를 걷고 짐을 꾸려 대구로 가기 위해 다시 긴 행군을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피곤과 겹쳐 더 힘들었다. 눈물도 찔끔 흘렸다. 설상가상으로 선배 한 사람이 벌집을 건드리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결국, 풍기에 도착해서 벌에 물린 사람들은 병원 진료까지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대구에 도착한 우리의 몰골은 피난민이나 다름없었다. 세수도 못하고 모자만 푹 눌러쓴 채,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며 그렇게 한참 동안 웃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쌀벌레 밥을 같이 나누던 그 시절 회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린 왕자를 좋아하고 별을 사랑했던 우리. 세월을 받아들이며 삶의 곳곳에 반짝거리는 자신들의 별을 보듬고 있으리라. 오늘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랜만에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 본다. ‘모두 잘 지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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