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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Sep 20. 2023

나의 늙은 장화

모든 것이 변하기만 할까. 


빗소리 ASMR을 들으며 잠든 적이 많았다. 비 내리는 계절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시들해졌다. 오히려 피해 소식으로 비에 대한 사랑이 걱정으로 바뀌었다.


어느 날, 장화 신은 한 학생이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가는지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참 예뻐 보였다. 문득 여고 근무 시절, 제자 지현이가 생각났다.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명품 운동화가 인기였지만 장화에는 관심 없었다. 그리고 왠지 촌스럽게 생각했다. 지현이는 비가 오면 어김없이 흰색 장화를 신고 등교했다. 공부를 꽤 잘했고 인기도 많았던 그녀는 학생들이 행복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 꿈이었다. 세월은 흘러 20년이 지났으니 그녀도 이제 40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리라. 학교를 세웠을까.


장화 한 켤레를 샀다. 텃밭에 다녀오면 신발이 엉망이 될 뿐 아니라 발목은 늘 모기의 공격 대상이었다. 장화를 고르기 위하여 가게 여러 곳을 들렀다. 오래 신을 생각에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 마침내 하나를 골랐다. 신발 바닥 부근에 노란 테두리가 둘리어 있는 파란색 발목 장화였다. 맘에 들었다. 처음 신은 날은 느낌이 좋아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모기에게 물리지 않았고 편했다. 왜 진작 사지 않았는지 약간의 후회도 했었지만 어쨌든 만족스러웠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매일 장화를 신고 벗었다. 신지 않은 날은 뭔가 허전했다. 

이른 아침, 장화 신은 기분이 이상했다. 여유가 있어 신기 편했는데 좀 끼이는 듯했다. 발이 부었다고 생각하고 텃밭 일을 마친 뒤, 늘 그렇듯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다. 그런데 다음날 장화를 신은 느낌이 또 달랐다. 한 번에 발이 쑥 들어가던 장화가 들어가지 않았다. 마루에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표면은 주름지고 모양이 일부 변형되어 있었다. 소홀히 다룬 탓에 신발에 상처가 많았다. 장화도 늙고 있었다. 그저 내가 좋아서 가까이 두었지만, 나의 게으름 탓에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벌레가 들어가 있어 기겁한 날은 장화를 잔디밭에 던져놓고 방치하기도 했다. 빗물이 들어가 물이 고여 있어도 그냥 두었을 뿐 아니라 한 번도 정성스레 닦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그 신발을 좋아했고 매일 신었지만 정작 관리에는 무심했다. 장화의 달콤함만 즐기고 오래 곁에 두고자 하는 노력은 부족했다. 


치매로 인해 엄마를 요양원에 모신 지인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병원에 갔다 온다는 그녀는 연로하고 병든 엄마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 엄마 앞에서는 자신도 치매 걸린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어린애처럼 떠드는 딸 앞에서 더 많이 웃는다며 자주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마다 내 마음도 애잔했다. 그게 사랑 아닐까. 진실한 사랑이란 상대가 달라지더라도 같이 맞추어 주는 것.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못할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한다. 장화도 변했고 나도 변한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지인의 마음이 그러하듯, 모양이 변했다고 장화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깝고 측은해서 장화를 볼 때마다 더 애틋한 마음이다. 외형은 본질보다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화병에 꽂힌 꽃이 아니라 마당에 있는 나무다. 때가 되어 말라 던져질 꽃이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음을 다해 키워가야 할 나무다. 


선물 같은 인생에서 그런 사랑을 빼면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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