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과 악을 구분 짓고 선을 좇으며 악을 적대시하는 것은 매우 간편한 일이다. 가시적으로 악의 상징처럼 표현된 여러 이미지들 혹은 아이디어들이 있다. 가령 사탄, 악령, 귀신 등은 종교에서 선한 신의 의지에 대비되는 불순함의 세력이며, 초월적인 현상을 전제하지 않아도 최근에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여러 마약 사범들이나 사기꾼, 혹은 부패한 정치 법조계 제반의 권력가 등에서 우리는 부정함을 찾아낸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나다. 어릴 적부터 기독교 관련 콘텐츠나 선악에 대한 이원론적 창작물들에 노출되어 왔는데, 남들은 웃어넘길법한 고전적 퇴마 의식에서는 어렴풋이 느껴오던 악의의 존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집어놓은 십자가처럼 선을 유린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속삭이는 갈라진 음성들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나는 왜 내가 그토록 혐오하는, 어떤 면에서 떠올리기도 싫은 절대적 악을 공포라는 장르에 엮으면서 소비하고, 더 나아가 일종의 희열을 느끼게 되는지 궁금했다.
투쟁-도피반응은 유명한 심리학의 생리적 기제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에 관하여 혐오스럽고 위협적인 것들에 반응한다. 어떤 위협이 실제 위협적인 것으로 감지되면 자동으로 생존을 위해 신체가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는 방식으로 과각성된다. 즉, 고등적인 인지사고를 관장 하는 대뇌피질에 우선하여, 편도체가 즉각적인 위협을 포착하여 시상하부를 통해 교감신경계를 각성시켜서 위협에 맞서거나 위협을 회피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이 도덕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가시적으로든, 악의의 색채를 띤 악에 대해서 우리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게 된다. 내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한 명백한 악에 대해서 편도체가 무뎌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되려 너무나도 선명한 악의 경계로 인하여, 악을 적대시하거나 악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너무나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의적인 것이 악의로 남을 수 있는 위험은 그것을 발견하거나 규정 지을 수 없다는 것에 있다. 퇴마 영화를 보면 일종의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것이 악마의 이름을 알아내어 호명하는 것이다. 상담학의 방법론 중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내 안에 희석되어 있는 어떤 문제를 외재화와 명명을 통해 나와 다른 것으로 분리하고 이것들을 객관적으로 다룸으로써 자기 통제권을 확보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악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부정성, 어떠한 고통, 어떠한 꺼림칙한 것을 다른 존재로 보고 대응하려는 시도이다. 헌데 악이란 무엇인가. 나는 단순히 인간이 선악이 뒤섞인 복잡한 존재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혹은 성선, 성악처럼 존재의 근원이나 방향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획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악이란 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악하게 여겨지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악으로 떠올리거나 차별적으로 인식할 수조차 없는 평범성, 혹은 무의식의 기저에 머무르고 있는 어떤 것이다.
가령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주범이라고 여겨지는 히틀러를 악인으로 여기지만, 서로 사랑하는 연인의 눈 마주침에서 악의를 발견하지는 않는다. 생판 모르는 남을 무참히 도륙한 살인범에 대한 보도에서 우리는 인간의 악의를 떠올리지만, 인스타 영상에서 반짝이는 아이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악의를 느끼지 않는다. 악이란 무엇인가. 악이 악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가 그 악에 대해서 헤아릴 수 없음이 자명하다. 진정한 악이란 의식에 떠올리거나 어떠한 단위나 개념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며, 그렇기에 우리가 위협으로 느끼기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떠한 무엇이 악한 것인지 선한 것인지, 혹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인지 혼란을 야기하는 딜레마의 차원도 아니다. 악은 악으로 인식될 수 없다. 그렇기에 악이다. 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의식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악을 전개해 나간다. 진정한 기만은 빈틈없는 거짓말이며, 악이란 우리가 결코 스스로가 속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없는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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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자문하여 본다. '나는 악한가?' 어떠한 측면에서 자신의 악행이나 결점을 떠올리면서 '어느 정도는...'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겠다. 하지만 이런저런 증거들을 대가면서 우리는 악하지만은 않은, 때때로 선량하고 성장지향적이며 자기 자신 및 타인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의 모습을 토대로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악한가, 더 나아가 '인간'은, '존재'는 악한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여전히 우리는 끝없는 재판을 이어가면서 그 색채를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의 생존이나 가치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 악에 대해서 나는 이야기할 수 없다. 선악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나와 타인을 어느 곳에 위치시키든 그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판별할 수 있고 위협으로 인식되는 악이 있다면 그것은 악하다고 여겨지는 무엇이지 악이 그것에 국한될 수 없다. 악마가 실재한다면 그는 기만하는 자, 곧 악이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 악의 존재나 정체를 기만하는 자이다. 우리는 간혹 복잡하거나 모호한 문제에 직면하여 선악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할뿐, 너무나 간편하고 속편하게 악한 타인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납득하지 못할 자신의 모습을 자책한다. 실상은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모르는 채 악이 없는 것처럼 대부분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영화 <곡성>의 마지막을 보면 부제가 악마로 추정되는 일본인을 찾아가 동굴에서 묻는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 "내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악마, 너는 악마다. 왜 대답을 못해?" "자네가 이미 말했잖나. 내가 악마라고. 그렇지 않나? 자넨 이미 내가 악마라고 확신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걸 들고. 내가 누군지 아무리 내 입으로 말해봤자 네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절대. 넌 내가 악마라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거야." "아니라고! 만약에, 네가 지금 악마가 아니라고 말하고 솔직한 정체를 밝힌다면 그냥 돌아가겠다." "날 놔두고 그냥 가겠다고?" "그래" "그냥 가겠다?" "그래 그냥 갈 거야." "(소름 끼치게 웃으면서) 누가 널 그냥 보내주겠대?"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를 내려가고 말고는 네 의지가 아니라고.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후 그의 손바닥에 성흔이 나타난다. 그리고 사진기를 들어 부제를 찍는다.)" "뭐 하는 거야? 하지 마."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곧 그의 형상이 뿔 달린 악마의 모습으로 바뀐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귀신이나 악마가 등장하는 뻔하디 뻔한 공포영화를 보면서는 겁에 질리다가도 악이 정체를 숨기며 사람들을 압도해나가는 <곡성>을 보면서는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이는 <곡성>에서 고찰하는 악이 우리 일상에서 정체를 숨기며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는 모습과 닮았다. 차라리 대놓고 악하다고 존재를 선언했더라면 싸우거나 도망쳤을 나에게, 악은 스며들고 있다. 나는 종교인도, 재판관도 아니며, 선인이나 악인도 아니다. 하루에도 '자기'라는 경계가 수없이 무너지면서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의심할 뿐 다시 이전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악마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