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만 있었네
엔딩은 예상치 못한 때 찾아왔다. 알코올중독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었고, 패시브로 작용하던 우울증 때문도 아니었다. 우리가 모두 시선을 그쪽에 두고 있을 때, 심장에 병이 생겼던 거였다. 한사코 건강검진 하시라던 말을 '내과에서 이미 피검사 했다'고 거절하던 아빠는, 심장초음파가 필요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돌아갈 수 있다면 건강검진을 하시라고, 큰 병원에 가시라고 내가 한 번 더 말을 했을까?
7월 말 어느 화요일 출근길에 전화를 받았다. 엄마에게서 이 시간에 전화가 왔다는 건 정말 시급한 일이거나 정말 소소한 일일거라 생각하며. 둘 중 전자였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제까지 나름 잘 지내던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서울대병원으로 올 것을 주문받은 나는, "우리 아빠가 맞아?"와 "혜화 서울대병원 말하는 거지(분당이었다)?"를 되묻곤 택시로 갈아탔다. 카카오택시를 부르고 남편에게 전화해 소식을 알릴 때까지 참던 눈물은 기사님께 행선지와 빨리 도착해야 하는 사유를 말하면서 터져나왔다. 60대가 넘은 듯 보이는 기사님은, 아버지가 몇 세이신데요, 물었다. 아직 환갑이 안 된 아버지의 나이를 듣더니, 아직 젊으신데, 하곤 여러 차를 새치기하셨다. 나는 평생 운전하며 새치기하는 차가 있거든 대학병원에 가는가보다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그로부터 3일을 병원에서 보냈다. [마지막 인사일 것 같으니 들어와서 얘기하세요]와 [조금 더 해보겠으니 밖에서 기다리세요]의 반복이었다. 마지막 인사같은 걸 준비해놨을 리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보니 웃음이 나오는 순간도 있었다. 닥치는 대로 아빠가 갖고 가야할 것만 같은, 우리의 기억들을 읊었다.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말들도 했다. 감사하게도 첫 날에는 눈을 뜨고 듣기도 해서, 나만 말하는 대화 같은 것도 할 수 있었다. 아빠는 어깨 밑에 뭉친 병원복을 펴달라고 어깨를 들썩일 정도여서 응급실인데도 크게 웃을 정도로 좋았다. 그러고 다다음날 인사하러 갔을 때 아빠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고 듣기만 했다. 마치 갈 때는 다 됐는데 인사 들으려고 버티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로부터 또 3일은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나를 울게 하는 조문객도, 나를 안 울게 하는 조문객도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말로 못 다하게 감사했다. 나는 앞으로 돈을 계속 벌어서, 아빠가 떠났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금액을 지갑에서 ATM에서 꺼내어 봉투에 넣어 담은 그 마음들에 갚고 싶었다. 검은 셔츠와 긴 바지를 사입고 왔다는 사람, 밤 새서 빈소 지키려고 보드게임을 들고 온 사람, 상복을 입고 배웅하는 나를 사진 찍어준 사람, 오자마자 나는 너한테 절 못한다며 왜 거기 있냐는 사람, 휴지로 꽃을 접어 울고 있는 고인의 사위에게 가져다준 사람, 금토일 휴가 중 2번을 방문한 사람, 10년 전 인연인데 단톡에서 소식 듣고 찾아온 사람, 장지에 같이 가겠다고 새벽 다섯시에 나타난 사람. 평생 갚고 싶은 마음들이었다. 엔딩을 조금이라도 더 화려하게 해준 것 같아서, 뭐라도 아빠한테 세상이 더 해준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아무 보통 엔딩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