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타칭 금손인 저는 요리에 있어서는 하위 5%의 똥손이기에 요리전쟁 글에서만큼은 제 주제를 파악하여 스스로를 '소인'이라 칭합니다.>
소인, 소인을 따르던 남자와 혼례를 올린 지도 17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외모는 소인의 이상형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지만 그와의 혼례를 결심하게 된 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허를 찌르는 유머감각으로 소인을 즐겁게 해주는 광대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고, 나머지 하나는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헌신적인 마당쇠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재치 넘치는 언변으로 소인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건강한 체력으로 방전된 소인 대신 집안일을 척척 해내며 소인의 신체를 보살피니 다른 조건에 욕심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였기에 그는 단 한 번도 소인에게 요리를 요구한 적도 없거니와 오히려 본인은 뭐든 잘 먹으니 소인더러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질문하여 기꺼이 두터운 제 몸을 움직여 사다 주곤 하는 어미새 같은 자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육아의 왕, 에버랜드의 마스코트, 판다 아이바오 같은 자입니다.ㅎㅎ외모가 꽤 닮기도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인이 올해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요리와의 전쟁을 벌이게 된 데는 아들의 수능도시락 말고도 또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아마도 소인은 소인의 요리를 통해 올해 초 돌아가신 엄마의 손맛을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식당이라곤 중국집 하나뿐인 농촌, 대문만 나서면 온 동네가 가깝고도 먼 친척인 집성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인의 입맛은 엄마의 손맛에 잘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엄마를 닮아 손이 야무져서 집안일을 곧잘 돕곤 했는데 청소나 빨래, 장보기, 동생 돌보기 같은 허드렛일은 많이 했지만 정작 요리를 함께 하거나 엄마를 대신하여 요리를 맡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소인이 거든 요리라고 해봐야 그저 김에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리거나, 만들어준 양념장을 꼬막이나 깻잎에 바른다거나, 콩국수를 만들기 위해 홍두깨로 면을 밀 때 바닥의 보자기를 붙들고 있는다거나 멸치똥을 딴다거나 하는 그야말로 식당에 첫 출근한 말단보조가 하는 일 정도였지요. 요리를 배우지 않은 것이 소인의 의지였는지 가르치지 않은 것이 엄마의 의지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소인은 엄마의 요리를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병을 알게 된 후 꼬박 일 년 반을 투병하시고 올해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뒤인 구정에 엄마 차례상을 차리고 그러다 49재가 와서 49재를 치르고 돌아가신 후 맞은 엄마의 첫생신에는 미역국을 끓여 납골당에 가서 상을 차리고, 추석때 다시 차례를 지내고.. 돌아가신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네 번의 상을 차리면서 엄마의 음식맛을 재현하지 못하는 소인의 손이 몹시도 원망스러웠습니다. 미역국은 밍밍하고 탕국은 싱겁고 나물은 어렵고...
원망한들 요리는 늘지 않고 직장일에 집안일에 바빠 사 먹는 일이 많으니 소인이 반찬가게를 고르는 기준은 자연스레 '어느 반찬집이 울 엄마 음식맛과 비슷한가?'였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산 어떤 반찬이 자연스레 엄마를 떠올리게 하면 한동안 그 반찬을 사 먹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의 구매가 되풀이되며 엄마의 방식 이외의 맛을 느끼게 되면 여지없이 다른 반찬가게로 눈을 돌렸지요.
이렇듯 반찬가게가 소인을 백 프로 만족시켜 줄 수 없기에 소인 부족한 솜씨를 인터넷 레시피와 시판양념장으로 보완해 가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홀로 되신 아버지가 내년 봄즈음 소인의 동네로 이사 오시는데 그때 엄마의 손맛을 조금이라도 재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과정인 입관 중 소인은 엄마의 이마를 만지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엄마. 어릴 적에 내가 몸이 약해서 1학년때까지 엄마가 많이 업어줬잖아.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내가 엄마로 태어날 테니 엄마가 딸로 태어나줘. 엄마가 날 돌봤던 것만큼 내가 엄마를 잘 돌보고 보살필게"
엄마가 돌아가시고 반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소인이 입관 때 왜 그 문장들로 마지막인사를 건넸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억이란 게 시작될 무렵부터 초등학교 1학년이던 7살 때까지(한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소인은 종종 엄마의 등에 업혀 어딘가로 실려가곤 했는데... 그 여정의 전부가 아닌 조각조각 어떤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 있고 도착한 곳에서 어느 할머니께 치료를 받았습니다. 바늘로 소인을 몸을 따주신 것 같은데 그곳이 집과 가까운 곳이 아니라 적어도 15분은 걸어가야 도착할 만한 곳이었지요.
소인이 살던 곳은 집성촌이어서 동네에도 수많은 할머니들이 있는데 왜 그 먼 곳의 특정 할머니댁까지 업혀갔을까? 평소에 가던 곳도 아니고 모르는 할머니였는데..라는 의문이 엄마가 돌아가신 뒤 한참 지난 시점에서야 들었습니다.
소인의 물음을 해결해 줄 만한 사람은 소인의 아버지밖에 없기에 얼마 전 아버지께 여쭤보았는데 어릴 적 소인이 종종 경기를 일으켰고 겁이 난 엄마는 정신줄 놓은 소인을 업고 수지침을 배운 어느 양반가 출신 할머니께 가서 소인의 상태를 봐주십사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제야 기억이 조각났던 이유, 돌만 돼도 걷는데 7살이 되도록 엄마등에 업혔던 이유가 이해되었습니다.
조각난 기억들에 대해서 사십 평생 궁금하지 않았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마지막 인사에서 무의식 중 그 기억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엄마의 사랑은 이렇듯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떠오르고 눈물짓게 합니다.
소인의 집 근처에 작은 하천이 흐르는데 그 하천을 따라 십 분쯤 걸어가면 꽤 큰 반찬집이 있습니다. 미안할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고 2만 원 이상 사면 서비스도 자주 주는 곳입니다. 어느 날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검은콩조림을 주셨는데 평소엔 절대 사 먹지 않는 반찬이었음에도 이후로 몇 번을 더 사 먹었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콩조림을 자주 해주셨다는 것, 그때의 맛과 비슷하다는 게 기억났거든요. 이 반찬가게는 왠지 오래오래 감사한 마음으로 이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요리와의 전쟁을 잠시 휴전할 수 있게 할 고마운 존재가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