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1)

by Nchips

카이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처음 만났던 사람은 유서린이다.


“소장님, LOVER 7, 시리얼 넘버 KAI- 071 깨어났습니다!”


저 멀리서 안경을 쓰고 흰 가운을 걸친 한 남자가 웃으며 뛰어왔다.


“오, 진짜네. 서린 씨, 고생했어! 이제 내가 세팅하고 일주일 뒤에 연락할게. 위에도 프로젝트 진행할 수 있다고 말해둘게.”


카이는 인상을 쓰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소장이라는 사람이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자, 자신의 메모리칩으로 이 세상에 대한 기본 정보가 입력되었다.


“안녕하세요. 기업 코너에서 제공하는 연애로봇 서비스, LOVER-7 시리즈의 시리얼 넘버 KAI-071입니다. 당신의 이상형은 무엇인가요? 제가 당신의 연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오늘부터 카이라고 불러주세요.” 입력이 완료되자마자 카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뉴얼을 읊었다.


소장과 서린은 서로 마주 보며 손뼉을 쳤다. “됐다!!”


“소장님, 저 이제 진짜 집에 갈 수 있어요!!” 끊임없는 수정으로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서린이 소리쳤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드디어 탈출이다! 이 지긋지긋한 연구소!” 연구소장도 덩달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퇴근할 수 있음에 감탄했다.


영문을 모르는 카이만 그저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처음 눈을 떴을 때 봤던 서린과 눈을 마주쳤다. 서린은 환하게 웃으며 카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녕. 난 유서린이야. 일주일 뒤에 합숙 프로젝트에서 보자. 더 인사하고 싶지만 일단 야근에서 탈출하고 싶거든.” 서린은 옷과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소장님, 저 이제 퇴근해볼게요. 일주일 뒤에 뵙겠습니다! 수고하십쇼!”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서린은 방을 나갔다.


소장도 퇴근하는 서린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카이 옆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렸다. 카이는 그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소장은 길게 하품하며 아무 말도 없이 카이의 메모리와 전반적인 시스템을 점검했다.

“소장님.” “으앗, 깜짝이야! 왜, 왜요?” 카이가 소장을 툭 건드리자, 소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나간 사람 누구예요?” 카이의 질문에 소장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일주일 뒤에 만날 사람. 아마 당신의 연인일걸요. 아, 카이. 매뉴얼 다 익혔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당신이 그 사람의 이상형이 되는 거예요. 앞으로 매뉴얼대로만 하면 돼요. 그럼 테스트는 완전 성공, 오케이?”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은 유서린 매니저. 앞으로 제 연인이 될 사람. 키는 180대, 여우상에 약간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외모를 선호. 성격은 장난스러우면서도 가끔 진중한 면이 튀어나오는 매력적인 사람이 이상형... 이네요.”


“그래, 딱 너야.” 소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슬슬 갈 준비를 했다.


“자, 아무튼 이 세상에 온 걸 축하한다. 연애용 로봇의 시초가 됐네. 이제 다시 잘 준비 해. 내가 일주일 뒤에 다시 깨워줄 테니까.”


“일주일 뒤엔 그 저택에서 깨나요?”


“그래. 거기서 테스트가 진행될 거야. 유서린 매니저가 잘 리드할 거니까 테스트 잘 받고. 그럼 우린 다시 보자고.” 소장의 말과 함께 카이의 정신이 뚝 끊겼다.


소장은 카이의 전원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기지개를 켰다.


연구실은 곧 암전되었다. 카이는 정신을 잃은 채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 눈이 뜨이기를 기다렸다.




“깼어요? 와, 일주일만이네.” 서린은 자연스럽게 카이를 맞았다.


카이는 다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색 베이스의 하얀색으로 포인트를 준 인테리어는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창밖을 바라보니 유럽풍의 정원과 작은 창고 같은 건물도 있었다.

“인테리어 괜찮죠? 내 취향이에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린이 물었다. “잠깐만요. 이것 좀 하고.”

카이는 그동안 자신이 입은 옷을 살펴보았다. 회색 후드티에 기본 청바지. 자연스럽게 부스스한 머리와 로션만 바른 얼굴. 향수는 뿌리지 않았다.


‘이것도 다 유서린 취향.’ 카이는 손으로 머리를 살짝 만지며 열중하고 있는 서린을 바라보았다. 서린은 남색 후드티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기본 메이크업에 손톱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 오늘은 뿔테 안경을 썼고, 역시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면밀히 관찰하고 하던 중, 서린이 갑자기 카이 쪽으로 홱 돌아보았다. 카이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자, 첫 만남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썸 단계로 갈까요?”


1단계 첫 만남 다음은 바로 2단계 썸이다.


“내 영화 취향은?” 서린이 물었다.


“액션, 수사물 좋아합니다. <미스터리 수사관> 시리즈와 <킬러> 시리즈를 즐겨봐요.” 카이는 매뉴얼대로 답했다.


“음악 취향은?”


“EDM, 파티 음악, R&B 좋아합니다. 최애 아티스트는 헬렌. 미국에서 유명한 팝스타요.”


“오케이. 그럼 음식 취향은?”


“해산물 빼고 다 잘 먹습니다. 특히, 당류 좋아하시네요. 건강을 위해 조절하시는 게 이 부분은 조금 조절하시는 게 좋겠어요.”


서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다. 완벽하네. 이대로 몇 번 데이트하면 썸 단계는 무난히 통과할 것 같아요.”


카이는 그런 서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린이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린은 꽤 가슴이 뛰었다.


‘이거 진짜 같다.’ 서린은 생각했다.


“그럼 이제 뭐 해요? 이상형도, 취향도 모두 알았는데.” 카이가 물었다.


서린은 슬쩍 서류를 살펴보았다. 썸 단계 마지막은 간단한 스킨십과 고백. 진정한 연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을 달성하면 된다.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서린은 꽤 긴장했다. 서린이 머뭇거리자 카이가 재빨리 서류를 낚아챘다.


“아, 저기! 잠깐만요.” 서린이 손을 뻗었지만 서류는 이미 그의 손에 들어갔다.


“이제 우리한테 필요한 건 고백, 이네요.” 카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로봇한테 설레다니.’ 그 말에 살짝 떨림을 느낀 서린이 머리를 짚었다.


카이는 유심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린은 처음으로 그 로봇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완벽하게 이상형에 부합한 얼굴과 손, 발, 입술, 목소리까지. 죄를 진 것도 아닌데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 동시에 도파민과 해방감이 느껴졌다.


“정말 난 당신의 이상형이네요. 그리고 내 이상형도 당신이고. 우린 완벽한 짝이네요.” 카이가 중얼거렸다.

“기분 나빠요?” 서린이 물었다.


순간, 카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 미안해요. 내가 연구팀이 아니라서 그쪽...이 생각하는 방식, 뭐 그런 건 잘 몰라요. 로봇이 자유롭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그냥 궁금해서요. 입력된 매뉴얼 말고요. 이런 서비스를 만든 관계자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서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난 내 가치관을 어기고 여기 입사한 거예요. 난 사실 로봇 윤리 옹호자예요. 대로봇 시대에 로봇이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들도 감정을 느끼는 만큼, 인간과 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이전에 대학교에서 로봇 노동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들은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인격체였어요. 그들은 우리 인간처럼 노동의 고통을 느끼고, 차별을 느껴요.


누군가는 그들이 학습한 대로 움직이는 고철덩어리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것을 학습시킨 것도 우리 인간이잖아요. 그렇다면 그 책임도 인간에게 있는 것 아니겠어요?”


카이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아, 지금 막 태어난 사람에게 이런 건 너무 복잡한가.” 서린은 중얼거렸다.


“위험한 생각이네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이가 대답했다.


“오만 같아요. 당신 태도는.” 그 말에 서린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리고 금세 얼굴이 벌게졌다. 분위기는 금세 어색해졌다.


"....미안해요." 서린은 조용히 사과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것보다, 나 겉옷 좀 주죠. 아무리 내가 로봇이라지만 이건 너무 추운데."


"아, 미안해요! 내가 몸에 열이 좀 많아서..." 서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놓인 후드집업을 건넸다.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보며 카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서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둘은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사실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카이가 말을 꺼냄과 동시에 초인종이 울렸다.


서린이 안절부절 못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카이를 돌아보았다. "아, 그게... 제 친구가 온 것 같아요! 제 회사 동긴데, 아무래도 너무 궁금하다고 해서... 잠깐만요!"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이 흐름을 깬 장본인을 기다렸다.


"내 기분이라..." 아까 서린이 한 말이 은은하게 귀를 맴돌았다. 카이는 그녀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아, 안녕하세요." 누군가 불쑥 카이 앞에 나타나 악수를 권했다.


위를 오려다보니 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윤호라고 해요, 카이씨.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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