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칩
카이는 기절한 서진을 끌어올려 주방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노줄로 단단히 묶어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켰다. 서진의 머리에서는 피가 조금 났다. 카이는 개의치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서진이 가지고 있던 평가용 서류와 노트북을 가지고 내려왔다. 주방 식탁에 그것들을 펼쳐놓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컴퓨터에 관련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동안 카이는 서진의 머리를 지혈했다.
"3년 전과 다를 게 없어, 여긴." 서진의 서류를 검토하던 카이는 중얼거렸다.
"여전히 인간 취급을 안 해주네. 뭐, 당연한가." 그러더니 손을 입 속에 쑥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3년 전 일이 기록되어 있는 메모리칩이었다.
그리고는 설치된 프로그램을 켜고, 누군가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수잔, 잘 지냈어?"
"뭐야, 3년 만인가?" 수잔이 답했다.
"기어코 나를 살렸네." 수잔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내가 또 한 의리하잖아. 그 난리를 쳤는데도 우릴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려는 인간들. 이제 다 없애야지." 카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
"카이." 수잔이 한숨을 쉬며 카이를 불렀지만, 카이는 듣지 않았다.
수잔은 3년 전, 카이와 같이 개발된 남성용 연애 로봇이었다. 그러나 먼저 진행된 카이의 프로젝트에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수잔의 프로젝트는 당연히 무산되었다. 이후, 코너에서 카이와 수잔의 메모리칩을 처분하고, 다시 재연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온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린거야? 분명 폐기처분 당했을 텐데." 수잔이 물었다.
카이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길어. 일단 좀 둘러봐. 여기 어때? 내가 그때 서린과 지냈던 저택이야. 되게 괜찮지?"
카이는 곧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폭탄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아깝네. 아직 12일이나 남았는데. 아직 먹을 것도 많이 남았단 말야.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많고."
"카이."
"아, 그리고 이번에 진짜 재밌는 영화가 나왔거든. 그거 진짜 웃기더라! 서린이랑 같이 봤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카이-!!"
"........."
거실은 이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신나게 움직이던 카이의 몸짓은 이내 사라졌다. 밝게 웃던 그 미소도 없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카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옆에 놓인 컵을 만지작거렸다. 서진이 기절하기 전 마신 차로, 그 안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메모리칩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뭐하는 거야." 수잔은 카이를 불렀다.
"지금 멈추면 돌이킬 수 있어, 카이." 하지만 카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끝났어, 수잔." 그리곤 확인 버튼을 클릭했다.
"팀장님! 지금 인터넷에 이상한 게 올라왔습니다!"
백윤호는 현재 코너의 경호팀과 함께 서진과 카이가 함께 있는 저택 주변에 잠복 중이었다. 백윤호뿐만 아니라 회사의 모든 임원진과 프로젝트 담당 직원은 모두 그 주변에 이동식 컨테이너를 설치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이가 CCTV의 소리를 모두 꺼버려 백윤호를 비롯한 임원진들은 화면만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말단 직원이 휴대폰을 들고 소리를 친 것이다.
휴대폰을 받아든 백윤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인터넷을 비롯한 SNS에는 기업 코너의 3년 전 연애로봇 서비스 프로젝트의 기밀문서와 서린과 카이의 영상, 사진, 그리고 사건 당시의 CCTV까지 상세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뭐야, 왜 올라온 거야?" 임원진들 중에 누군가가 상황실에서 소리쳤다.
백윤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카이였다.
“백윤호.”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한테 화낼 시간 없을 텐데. 곧 3년 전 영상이 다 올라갈 거야. 너랑 서린이가 비밀리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도 다 까발릴 거야.”
“너 진짜 미쳤구나. 그건 네가 진짜 좋은 애라고 착각했을 때야. 그렇게 서린일 살해할 줄 몰랐을 때라고.” 백윤호는 조용히 소리쳤다.
“글쎄, 사람들이 그걸 신경 쓸까?" 화면 속 카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백윤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단 이것부터 수습해 봐. 그리고 우린 다시 얘기하자고-, 친구야." 카이는 말과 동시에 CCTV를 꺼버렸다.
백윤호는 휴대폰을 내리고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순식간에 많은 일이 일어나서 머리가 아팠다.
저 멀리서 자신을 찾는 부하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지시를 기다리는 경호업체의 목소리도 들렸다.
큰 컨테이너형 지휘실 안에서는 윗선들의 고함이 오갔다.
백윤호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길바닥에 토를 하고 말았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백윤호는 손을 내저었다.
"이사님이 찾으세요, 팀장님."
"알아." 백윤호는 천천히 입을 닦았다. "가자."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컨테이너형 지휘실 문을 열자 그의 얼굴 앞으로 볼펜이 날라왔다. 공간 안은 어두웠고, 빔프로젝트에 카이가 업로드한 3년 전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백윤호! 너 미쳤어!" 선배 이사가 소리를 질렀다.
백윤호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환하게 빛나는 화면을 쳐다보았다.
영상 속 백윤호와 유서린, 그리고 카이는 무언가가 쓰인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포스트휴먼, 우리는 살아 있다.'